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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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4장_예언을 사모하라
- 느헤미야강
-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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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9(화) 새벽기도회
예언을 사모하라 <고린도전서 14장>
고전14장은 방언에 대한 목회적 답변입니다.
14;1-5절은 방언에 대한 예언의 상대적 유익을 말씀합니다.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하는 자가 아니라 예언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기도, 언행, 생각도 신령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면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토대가 아니면
어떠한 신령한 것들도 독선적이 됩니다.
신령한것만 추구하고 사랑은 쫓지 않으면
남은 것은 독선적인것만 남기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촉구하며 신령한 것 소망하되 예언을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미리예 자를 써서 앞날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예언은 맡길 예 자를 사용합니다.
예언자란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과거의 역사를 해석해주고,
현재의 역사를 바로보게 해주며,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보게 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예언을 하려고 하라 한 것은,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방언은 사람과 대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2절)
내가 방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하고도
나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말하고도 하나님께 기도하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을 하지 말고
그 말이 소통이 되는 말씀의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방언이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기도라면
말씀맡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3절).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받은 말씀을 가지고 입을 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깨우친것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겐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다면 깨우친 말씀으로,
그 말씀을 통해 덕, 권면, 위로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덕을 세운다는 것은 ‘집을 짓는다’(오이코도메오)는 말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살 집한 칸 짜리 세우면
그날부터 삶 차원이 달라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마치 집이 없던 사람에게 집에 들어가 살게 하는 것처럼
삶의 차원을 끌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참 권면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등불이고 빛이 되어 사람에게 권면, 인도, 위로를 줍니다.
천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손바닥에 새긴다는 말씀보다
더 큰 위로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위로되지 않는 방언 말고
예언, 말씀을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에도 덕이 있습니다(4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할 때
성령이 살아역사하신다는 확신이 내 속에 강하게 들어옵니다.
그 방언은 개인적으로 덕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덕 차원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말씀을 맡아서 봉사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게 됩니다(4절).
신앙공동체, 성도에게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영적인 집을 든든히 세워가게 됩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모두가 방언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5절).
그러나 특별히 말씀의 사람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고 합니다.
중요한 핵심은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입니다.
그래서 방언하는자가 통역을 세워 교회 덕 세우지 아니하면
모든 은사가 다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예배때에 사람앞에서 합니다.
방언은 귀한 것입니다. 그그 방언을 통역을 할 수 없다면
말씀을 맡은 예언자보다 결코 나을 수 없다고 합니다.
6절을 이런 말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바울이 세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받아들인 까닭에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서 너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했다면
너희들이 예수를 믿었겠느냐. 누가 알아들었겠느냐,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했기에 생명을 얻었고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7,8절은 생명없는 악기도 자기 본연의 음을 정확히 낸다면
하물며 성도들 역시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팔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듯이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 성도들이
교회에 앉아서 소통 안되는 언어만 하면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상대방의 언어를 못 알아들으면 그 사람에게 나는 외국인입니다.
그 사람도 내게 외국인이 됩니다(11절).
외국인에 각주가 붙어 있는데 야만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영적 높은 차원의 말을 한다해도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다른 사람을 야만인으로 만들게 되는데
너도 그들에게는 야만인이 되는 것이라 그런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헬라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헬라어를 못하는 이방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한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입장에서 헬라어를 하는 사람 역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 야만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통역을 할 수 있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13,14절은 방언이 자신에게 유익은 되나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인격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15,16절은 찬송할 때 가사가 있는 것은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의 작용을 통해 가사를 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 알아듣지 못하고서 어떻게 아멘이라 할 수 있냐고 합니다.
아멘이 나는 동의합니다. 신실함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방언기도 잘합니다. 기도 잘했다. 오래 했다.
내 자신이 흡족하게 여길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 없습니다(17절).
교회의 덕을 세우려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시작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나 믿음이 더해질수록
우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 말씀 깨달은 것 다섯마디가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19절).
일만마디 방언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일뿐입니다.
일만 마디를 말해도 오직 자기만을 드러내는 것이고
누가 더 큰가를 비교하는 곳에는 대립, 갈등 뿐 성령역사는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은 것이 다섯마디 밖에 안되어도
주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짧은 몇 마디에 한 사람 인생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교회에 간다는 것과
내가 바른 교회 생활을 한 결과가 나의 유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유익을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좋은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중에는
자기만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최우선입니다.
그것은 일만마디의 말을 해도 결국 자기 유익만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체험하고 보니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위해 삶 살았더니 결과적으로 나의 유익이 되더라.
그러한 삶이 성숙하고, 인격 고양,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 결과 자기 유익까지 이르게 됩니다.
방언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다섯 마디라도 참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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