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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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특색(5) 새벽은 하나님과 눈 마주치는 시간입니다_눅22;47-62

  • 느헤미야강
  • 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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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0()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5)

 

새벽은 하나님과 눈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22;47-62>

 

1.

2천년 전 금요일, 예수님이 체포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이려는 무리에게 넘겨준 이가

가룟유다입니다(22;47,48).

판 사람은 예수님을 3년간 모시고 회계 맡은 제자입니다.

그 제자가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첫째, 사람은 큰 돌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에 넘어집니다.

유다는 배신않고 끝까지 붙들었더라면 세상 그 무엇도

그의 생명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천하만국 권세를 얻고 예수를 판 것이 아닙니다.

천하 금은을 독식하고 예수를 판 것이 아닙니다.

고작 은30에 영원한 생명을 자기 발로 찬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큰 바위 나오면 돌아갑니다.

적어도 두 눈 뜬 사람은 절대로 큰 바위에 부딪쳐 넘어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돌맹이에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우리는 큰 유혹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유혹이 우리 망치게 합니다.

진리안에 깨어있지 않으면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주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배신한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기대와 다르다고 팔아넘겼습니다.

목사를 타락시키는 것은 목사요, 교인을 타락시키는 사람은 교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교인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타락한 교인이 성도 끌어 내립니다.

하와가 자기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동물에게 먹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주었습니다. 남편이 아내, 아내가 남편을 실족시킵니다.

우리가 깨어있어 나의 가까운 측근들을 진리로 세워야지

넘어뜨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나의 기대에 맞추어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사랑한다면서 넘어뜨리는 자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나 구원사역 가능케 했으니 구원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유다는 억울한 피해자아니냐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알고도 제사 삼은 것 아니냐, 그도 구원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가룟유다가 넘기지 않았다면 대제사장은 어떤 형태로든지

예수를 붙잡아 죽였을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에수님을 배신한 것은 개인의 욕망과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진리와 함께 있으면서도 진리를 버린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지 구원사역의 피해자가 아닙니다.

 

2. 보시니, 생각나서, 통곡하니라

겟세마네 기도중에 가룟 유다가 체포조를 데리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칼로 칠까요?

예수 대답하기도 전에 한 제자가 칼로

앞 사람의 귀를 내리쳤습니다(22;49,50).

요한18;10절은 베드로가 말고 귀를 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겠다고 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고 나무라시고(51).

이어 순순히 잡혀가십니다.

예수님이 잡혀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다고 말씀합니다(54).

 

멀찍이 따라가니라.’

방금은 칼을 들고 즉각 말고의 귀를 친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붙잡히니 가만히, 방관자로 따라갑니다.

방금 전 태도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왜요?

말고의 귀를 칠때만해도 예수께서 잡혀가실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2214절 최후만찬 후에,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 다툼이 있었습니다(24).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신통력가진 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를 물리치고 왕 될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때 자신들이 높은 자리 차지하고 싶어 다투었습니다.

이제 곧 왕이 되신 분이니 체포조가 타날 때 칼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무기력하게 잡혀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잡혀가셨다면 최측근인 자기도 잡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리를 둔 것입니다.

방금전 칼을 휘두를때와는 달리 자기 안위와 생명의 문제가 생기니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 붙잡혀 갔습니다.

한켠에 어떤 여자가 묻습니다. ‘너 한 편이지’, ‘아니야’,

잠시후 다른 사람이 너 맞지’, ‘아니야’.

한 시간 뒤 또 누군가 묻자 아니야라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 26, 처음에 그냥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맹세하고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내가 맹세코 그 저주 받을 사람하고는 전혀 모른다.

베드로가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예수님은 그의 삶속에

안중에 없다고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했을까요?

 

22;60,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26장에서는 부인하고 저주할 때 닭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찬석상에서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베드로가 말하자

네가 닭울기전 세 번 부인할 것이라 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자 닭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다른복음서는 그 닭소리 듣고 말씀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보시니, 생각나서, 통곡하니라.

이 동사들을 연결시켜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 말씀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기 이전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하는데 예수님이 돌아서보셨습니다.

베드로와 눈 마주쳤습니다.

그때 우리 같으면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요?

내가 3년 동안 먹여주고 함께 했는데 모른다. 저주한다면...,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2;42절에서 베드로를 처음보았을때와

같은 사랑의 눈빛으로 보셨습니다.

기대와 사랑, 따듯한 눈빛으로...

예수님이 흰눈으로 보았다면 베드로도 할 말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의 사랑과 인자한 눈빛으로 보신 순간에 눈 마주치자,

네가 나를 부인 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새벽닭은 계속 웁니다.

주님 눈빛 마주친 순간 닭 울음소리 들리고 말씀 생각나

밖에 나가 통곡합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마주한 새벽시간이었습니다.

 

새벽 기도시간은 주님과 눈을 맞추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매일 새벽에 주님과 눈을 맞추고 그 사랑에 힘입어

주님 말씀 생각난다면 베드로처럼 어긋난 마음 가졌어도

교정되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새벽은 매일의 삶속에서 잘못된 생각, 고장난 믿음을

예수님과 눈 마주치고, 말씀이 생각나 우리의 어그러짐을 교정하고

새롭게 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눈 마주치면 생각날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유다도 이 주님과 눈을 마주치는 삶을 살았다면

어리석은 짓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공회, 헤롯의 심문,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19;30절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침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니,

죄지은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신 시간이 오후 3시입니다. 6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15;44절 마지막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찾아가

시체를 인계받기를 요청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빨리 죽으신것에 놀라고 백부장이 확인합니다.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하루 정도, 건장한 사람은 2,3일 까지도 걸립니다.

그런데 6시간만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6시간만에

돌아가실 수 밖에 없으실만큼 허약한 상황과 몸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체력으로 지셨다면

골리앗, 헤라클래스로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힘으로 지신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생명의 무게로 십자가를 져주셨기에

십자가에 우리에게 더 감동됩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해골의 정수리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허약하신 분이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피가 해골 위에 떨어집니다.

그 피에 젖은 죽음의 해골이 다시 살아납니다.

 

리는 새벽마다 주님과 눈 마주친다는 것,

해골위에 세워진 십자가의 주님과 눈 마주치는 것입니다.

누가 오늘 주님을 믿습니까?

내가 해골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이 믿습니다.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인간이 비로소 여호와 이름을 불렀을 때는

자신들이 에노스인 것 알았을때입니다.

에노스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죽을수 있는 존재인 것 몰랐을 때는

자발적으로 하나님 부른적 없습니다.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나의 결국이 해골임을 아는 사람이 주님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에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해골을 보고

주님과 눈 마주치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생각하고

죄송하여 미안해서 통곡함이 있어야 하고

그 힘으로 우리를 교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 고난이 우리를 위한 위대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일이 부활절이나 매일을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매일 매일은 부활절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