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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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장_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 느헤미야강
  •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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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새벽기도회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4;7-15 중심으로>

 

 

고린도후서 4장은 바울이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토대는

주님의 긍휼하심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1)

특별히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택함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은 주님을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택하심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3,4).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주님의 긍휼하심때문이었습니다.

 

6, 천지창조하실때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예수 그리스도안에 주셨고

그 예수를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7절로 이어집니다.

7,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가앞에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 보배는 6절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인 예수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어둠에서 시작 빛으로 끝나고,

무질서로 시작해서 질서로 끝나고,

공허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채우고,

무로 시작해서 유로 끝나고,

절망으로 시작해서 소망으로 끝납니다.

어둠에 눈 멀어 있던 우리에게 주님을,

곧 하나님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곧 보배입니다.

주님은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니 그 빛이 보배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빛을 알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담았다면

그 질그릇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7절은 그러나로 시작되었습니까?

세상 사람은 보배를 보석 상자에 넣습니다.

그 수준에 어울리는 상자, 잠금장치가 있는 곳에 안전하게 둡니다.

그 보배 아무곳에나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습니다.

질그릇은 우리 자신입니다.

가장 가치없고 싸고 부서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하나님에 비해 우리는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은 보배합에 넣는데 하나님 자신을 우리 속에 넣어주셨습니다.

이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같이 보배로운 분이라면 그것을 받을만한 그릇에 두어야 하는데

전혀 아닌 질그릇인 우리에게 담겨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7,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앞에서 질그릇 밖에 아닌 것을 깨닫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안에서만 비로소 의미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긍휼을 베풀어주시려고 당신을 우리속에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물, 공기, 피입니다.

이것들 중 우리가 작은 것이라도 만들 수 있습니까?

우주를 날아가는 시대 늙음을 막고, 죽음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대단한 것 같아도 생명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속에서만, 긍휼하심속에서만

하루 하를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먼지 밖에 안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담겨주셨음을 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질그릇인 자신에게 하나님이 담겨지셨음을 알았기에

바울은 사도로서 바른 자세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인 우리가 가짐으로 어떤 일이 있게 됩니까?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우겨쌈을 당하다’.

포도 열매를 즙 만들기 위해 내려 누루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살다보면 내 삶 처지가 우겨 쌈 당하는 것 같을 때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황자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겨쌈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내 육체는 싸일 수 있으나 내 중심은 쌓이지 않습니다.

내 상황이 싸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나의 자세는 싸이지 않습니다.

내 속에 그분이 계시는데 세상 무엇이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우겨 쌀 수 있는가? 그러니 난 안쌓이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로 낙심도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내 속에 그분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답답한 상황이나 하나님의 빛으로 보니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할 수 있으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박해 받는다는 말은 사냥꾼이 사냥감보고 쫓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발견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쫓아갑니다.

맹수가 먹잇감 쫓듯 세상사람이 나를 박해할지라도

나는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먹잇감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에 그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무엇이 하나님을 담고 있는 존재를 사냥감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내속에 계시는 한 누가 덤벼도 나는 먹잇감이 되지 않습니다.

 

9절 하반절,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완전히 넘어짐을 말합니다.

그래도 끝난게 아닙니다. 망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난 죽지 않는다.

죽음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속에 계십니다.

그 분이 내 속에 계시는 한,

내 육체가 죽는다 해도 망하는 것 아닙니다.

나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참수형당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꾸러뜨림 당하고 목 잘라도 다시 살게 될거다 그 확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자세는 중요한 신앙자세를 일깨워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믿는 삶 살 때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답답함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박해받지 않고,

거꾸러뜨림 당하지 않고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얼마든지 우겨쌈 당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육체적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일 당할 수 있습니다. 핍박받고 박해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기댄다, 맡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기대는 것, 맡기는 것입니다.

이 벽에 기댄다면 전제조건은 저벽이 버텨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삶 전반에 걸쳐 믿고 기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상관없이 우겨쌈 당하는 일 당해도,

그래서 손 털고 하나님 바이 바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기대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 있는자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책임져 주실것이면

처음부터 책임져 주시지 않으시는걸까요?

11,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몸은 죽은 육체입니다.

매일 매일 하루씩 죽어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육체는 썩어 흙이 될 이 육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다 흙으로 없어질 육체인데 예수생명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흙으로 화한 육체에 그보다 멋진 삶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서 살아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자발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이 육체가 그 생명의 통로로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 진리의 생명이신 예수님 사랑은 주님을 믿는

우리의 육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 자체를 목적을 삼으면 천한 것이 되지만,

우리 육체가 이 땅에 육체로 존재할 때

예수 생명, 예수 사랑, 진리를 보여주는 도구된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육체는 없을 것입니다.

진리안에서도 예수 사랑 도구가 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12절을 통해 바울은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살아있음에도 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죽는 것은 자기를 통해서

예수 생명이 드러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목적은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제 1목적이 아닙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위한 것입니다.

나를 통로로 누군가 구원얻게 할 자를 위해

내가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합니다.

구원의 생명은 너희(다른 사람) 안에서 역사합니다.

나는 죽음으로 결국 내가 살지만 또한 너도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에서 죽었더니 그 결과 고린도교회가 생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겼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이 있기까지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죽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분 자존심 버리고,

그 분의 시간을 버리고,

그 분이 죽어서 내 속에 예수 생명이 역사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으면 누군가가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 믿을 때 내 삶 가치가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죽어 내 안에 예수가 살고

내가 죽으니 다른 사람속에 예수 생명이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방향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