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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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21장_전도자 빌립과 바울
- 느헤미야강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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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3(수) 새벽기도회
행전8장과 21장 사이의 빌립, 그리고 바울
사도행전 21장 (7-14절 중심으로)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행전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인
빌립 집사의 집에 숙소를 정합니다(8절).
빌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집사로 선출되었습니다.
빌립이 주님의 이끄심으로 활약할 당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투옥하고 폭행을 일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융화할 수 없는 사이였으나
어느순간에 믿음의 우정을 쌓았습니다.
바울이 빌립의 집을 숙소로 삼을만큼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9절 이후는 그 빌립집에서 일어난 일을 밝혀줍니다.
10,11절의 증거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행전 11;28절에 로마황제 글라우디오 때에 큰 흉년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던 ‘아가보’가 이번에는 바울의 복음사역속에 있을 일을 예언합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자 12절에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
그곳 사람들인 빌립과 그 집안의 네 딸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울면서 거듭 만류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대답합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13절)
자기 일행과 빌립 가족이 눈물로 만류하는 이들에게 반문합니다.
‘상하게 하다’. ‘쉰드 립톤’(헬), ‘산산히 깨지다’는 의미입니다.
만류하는 일행과 빌립 가족보고 마음이 깨지는 느낌이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만류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야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만류합니다.
믿음에 관한한 선배격인 빌립이 그 딸들과 함께 만류합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데 ‘전도자’ 호칭을 받는 빌립이
전도자 소명의 길을 가는 바울을 눈물로 만류합니다.
보는 바울의 심정이 갈갈히 찢겨진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를 위해 결박 당한 뿐 아니라
죽기도 각오하였노라’(행21;13하반절)
바울의 이 선언은
첫째로, 주님의 이끄심에 자기 자신 맡긴 의지를 재천명한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앞을 가로막아서는 안될 일행과 빌립향한 질타이기도 합니다.
옛날, 빌립이 전도자일 때 바울은 포악한 자였습니다.
이후 바울이 주님의 이끄심 앞에
빌립이 바울을 만류할때 오히려 질타당했습니다.
바울과 빌립의 믿음이 역전된것입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났을까요?
행전 2,000년 기독교역사상 7집사 중 빌립집사를 크게 소개합니다.
행전 8장에는 빌립집사 이야기로 가득차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짐승보다 못하게 여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셨지만 명령받는 제자들은
사마리아에 복음전도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빌립집사입니다.
그후 70킬로 떨어진 유대광야로 불러내셨습니다.
먼 길 걸어온 빌립에게 쉴 틈 주지 않고 광야길에 나타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광야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주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갔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행전 8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세례를 베푼 빌립을 주의 영이 이끌어갔고
이 빌립이 아소도에서 여러성에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행전8;38-40)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빌립을 성령께서 또 이끌어가십니다.
유대광야 끝 아도소를 거쳐 북상하여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젊은시절 빌립은 단 한 번도 자기 안일을 꾀한적이 없었습니다.
자기주장이나 이의를 제가한적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이끄시는 주님손에 자신을 맡기는 청년이었습니다.
행전 8장은 주님위해 맹활략을 펼친 빌립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어 두 번째로 본문에서 빌립이 다시 등장합니다.
행전8장과 21장 사이에는 30년 시차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주님 이끄심에 가이사랴에 도착한 빌립, 30년동안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아직 시집을 가지 않는 네 딸과 살았습니다.
그 네 딸들과 함께 사는 집이 협소했다면
과년한 딸이 살고 있는 집에 바울이 숙소를 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도자의 삶을 산 빌립, 과년한 네 명의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은
바울과 일행들, 아가보를 먹이고 재울만큼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전도자로 불리고 있으나
세속적으로 유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빌립앞에서 아가보가 바울이 옐살렘에서 투옥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에 대해 예전의 빌립이면 주님 맡기신 사명의 길을 가려는 바울에게
내가 함께 동행하겠다며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관한한 선배격인 빌립과 일행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습니다.
가이사랴에 정착해서 인생말련에 접어든 빌립은 예전의 빌립, 30년 전 빌립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이끄심보다 지금 세상에서 누리는 유복한 삶이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유불리 기준으로 주님의 뜻을 판단했습니다.
빌립에게는 이제 결박, 환란이 있다면 그 길이 아무리 주님의 길이라 해도
그 길 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나이든 빌립의 삶에서 십자가는 없어졌습니다.
십자가는 빌립입속에 말과 구호로만 존재할 뿐,
자기희생 헌신이 전제되는 삶의 실천으로서의 십자가는 실종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구호가 아니라 삶의 실천이 수반될 때 생명으로 역사합니다.
그 빌립이 믿음에 관한 한 후배 바울에게 질타 당합니다.
어쩌면 주님의 은혜로 그 질타받고서 빌립은 자기 삶 추수렸을지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주님의 이끄심에 변함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는 바울은
행전 8장 빌립이야기 다음장인 9장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오늘 본문까지 주님을 향한 초심을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바울이 빌립집에서 선포한 대로 환란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였다는 마음은
소멸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로마에서 죽을때까지 바울은 주님손에 자기 생을 맡겼습니다.
믿음의 시작, 과정이 중요하다면 끝은 더 중요합니다.
끝이 믿음으로 마무리 되지 않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 주님 믿고 이끄심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주님을 잘 믿었어도 지금 유복한 삶,
있는 것을 더 중요시 한다면 하나님손은 어린아이 손보다 더 짧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부요함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생명의 그리스도인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눅23;4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육체 생명이 멎는 마지막 순간 생명을 하나님손에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붙잡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손, 죽음 이기시는 손을 붙잡으셨습니다.
그것 믿으셨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당신 자신을 기꺼이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예수님을 죽은 한 가운데에서 일으켜
영원한 생명의 구주되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 본 받아 죽기까지 예수 본받아 산 바울처럼
호흡을 멈추기까지 우리 자신 역시 온전히 맡겨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십자가를 삶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죽어서 살게되는 영원함을 누리를 삶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행전8장 혹은 31장, 아니면 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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