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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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24장_ 의,절제,심판
- 느헤미야강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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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24;24-27절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총독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내어
예수 믿는 도의 요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바울은 거침없이 세 단어로 대답하였습니다.
'의', '절제', '심판'이었습니다(행 24:24~26).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절제는 ‘하지 말라야 할 것을 제쳐 버리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형벌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셈, 상 주심입니다.
25절, 바울로부터 믿음의 요체가 의, 절제, 심판임을 전해들은
벨릭스 총독은 두려워하며 바울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권력자들 앞에서 권력자들이 듣기 좋은
기복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의, 절제, 심판의 메시지는
탐욕으로 가득찬 벨릭스 총독으로서는
어느것 하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심판의 메시지는 벨릭스로 하여금 불쾌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기에 바울을 감옥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가 사로잡힌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자 바울을 더 자주 불려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26절은 자주 부른 이유가 뇌물을 바란 까닭이라 전합니다.
당시 신흥종교집단의 지도자로 알려진 바울에게
상당한 재력이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을 불러도 뇌물을 바칠 기미가 없자
죄가 없음을 알고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헤롯궁에 2년 동안 방치했습니다.
한마디로 벨릭스는 인기 영합주의,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전형적 부패관리, 한심한 인간입니다.
바울은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법정에서 바울 변증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요체를 직접 듣고 여러차례 개인적 만남을 가졌습니다.
2,000년전 로마 사람 중 바울과
그런 시간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바울의 말에 귀 기울여 예수 영접했다면
로마를 새롭게 하는 또 한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믿음의 핵심을 듣고 잠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그 두려움이 사라지자 관심이 돈으로 회귀했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박찬 그가 로마로 귀환하여 현직을 떠난 후
최후는 전해진 바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도 때가 되면 내려와야 합니다.
천년만년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 죽음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현직을 떠나도 하나님 도구에는 변함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산폭발로 죽든, 전쟁으로 죽든, 병으로,
혹은 잠자다 죽든 그 죽음은 예수안에
영원한 생명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두 동일합니다.
만약, 벨릭스와 그 부인이 바울말에 주님 영접했다면
현직을 떠나도 하나님 도구로 쓰임받다가
셈하고 상주시는 하나님앞에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 박찬 그들은 영원한 심판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자신들 자화상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심판에 관한 설교를 들을 때 잠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그 시간 지나면 언제나 벨릭스처럼
돈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치고 믿음의 핵심이 의, 절제, 시만을
모르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중 믿음의 핵심이 의, 절제, 심판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중 믿음의 핵심이 의, 절제, 심판을 알지만
믿음의 진전은 역순으로 진전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셈하심과
상주심을 믿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만 그 결과로서 절제, 의가 수반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믿는 사람만 그날에 대비하여 그리스도인 답게 체쳐 놓아야 할 것을 자신의 삶속에서 미련없이 제쳐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 셈하기를 기대하며
울면서도 뿌려야 할 씨를 뿌리고 주어진 책임을
미룸없이 부여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상주심 바라보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삶으로는 실재화시킬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에게만 부활이 있는 줄 압니다.
바울은 악인의 부활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부활을 하는 것이고,
악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악인, 선인, 모두 심판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셈과 상이 있고,
악인의 부활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바울은 심판을 믿었습니다.
바울이 심판 믿지 않았다면 실생활은 주님과 무관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고전9;24-27절의 고백처럼,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의를 따라 행한 것은,
상주시고 셈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평등’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갈6;7-8절은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의 하나님’이시라 하십니다.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이루는 의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짧지 않는 손으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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