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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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21장_내 어린양, 내 양, 내 양
- 느헤미야강
- 20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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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토) 새벽기도회
내 어린양, 내 양, 내 양 <요21장>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번째로 나타나셔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은 제자들을 위해
떡과 생선을 구워 아침 조반을 준비해주시사고 나누신 후에 일입니다.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릴리 바닷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고,
베드로 역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이 끝날 때마다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에 대한 사람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의 양을 치고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 되풀이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주님의 양들을 돌봄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돌보아야 할 주님의 양 떼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세 번 다 양으로 표현하였으나 많은 헬라어 사본에 의하면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하심으로 구별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실 때 어린양은 헬라어 arnion을 사용했는데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파생된 말입니다.
어린양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은 양, 이제 갓 태어난 양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양은 probation으로 probaton의 파생어입니다.
장정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의 양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청소년기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 양은 probaton으로 장성하여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을 돌보라고 명령하시되
어떤 상태의 양 만을 국한하여 지칭하신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양에서부터 중간, 발육이 끝난 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양들을 구별없이 돌보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떤 장소, 어떤 상황, 어떤 시간에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양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나에게 믿고 맡겨 주신
주님의 양으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태로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기능적인 면에서 쓸모없어 보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춘기에 처한 청소년처럼 매사에 반항적이고
심사가 꼬여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중심으로만 살아온 어른처럼
지배자와 같이 군림하려고만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일단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 모두를 구별없이 주님께서 나를 믿으시고 맡겨 주신
주님의 양들로 생각하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가 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서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arnion 아니었습니까? 매사에 반항적인 probation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지배하려는 probaton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양이 아니라고 포기하신적이 없으십니다.
변함없이 끝까지 책임져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함께 영적인 갈릴리 바닷가에 거하는
거듭난 베드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주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변덕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당신의 양 떼로 인정하시고
품어 주신 결과로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기에,
우리 역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비로서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말씀하신 가라지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곡식의 씨를 뿌렸는데 못된 원수가 와서
밤에 가라지를 뿌리고 도망쳤습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하고 뽑아내려 하자
추수때에 가라지를 따로 뽑아 불에 태우자 하십니다.
좋은 곡식은 하나님 자녀를, 가라지는 악의 자식들,
밭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가라지를 뿌리는 것을 용인하셨을까?
왜 가라지를 용인하시고 추수때까지
알곡들이 가라지들과 함께 살도록 하셨을까요?
알곡들이 가라지와 함께 살아도 도태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가라지보다
더 크고 강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가라지 때문에 알곡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생명력이 강인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야말로 하나님께서 알곡을
온상속에서 자라는 연약한 생명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생명으로 세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풍성한 수확만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모든 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강하고 큰, 바른 생명력입니다.
적어도 알곡은 지금 자기 곁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가림 없이 모든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알곡이라면 더불어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어서 좋고,
가라지라면 자신의 생명력을 더욱 강인케 해 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 줄 것이기에 배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내게 맡겨주신 사람,
혹은 나를 위하여 내 곁에 두신 사람들로 인식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자가 설령 가라지와 같이 못된 자라 할지라도
그가 내 곁에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더 크고 강하게 가꾸어 주시기 위해
마련해 두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구별없이
내 양을 먹이고 치라하신 주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쓴,
[20대에 운명을 바꾸는 50가지 작은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직장 같은 곳에서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부딪힐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당신은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배려하지 않을까 하고 실망합니다.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과 부딪히면,
‘나도 혹시 이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신을 돌이켜보도록 합시다.
싫어하는 사람은 신이 대신 보낸 사람입니다.
‘때때로 너도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구. 어때, 언짢지?’ 하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이 보낸 사람이다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진정으로 바뀌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믿으시고 맡기신 사람들이요,
여러분들을 위하여 보내 주신 한님의 은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 모두와 더불어 살아가는 강하고 큰 그릇,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생명이 되십시오.
이것 하나로 여러분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요,
그 같은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한
사도행전의 새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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