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행전1장_함께 모이사

  • 느헤미야강
  • 2019-01-15
  • 662 회
  • 0 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있었던 일을 본문 4절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이 말에 주목하여 보고자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사도라는 말이 없이 함께 모이사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사도들을 통해 어떻게 퍼져 갔는지를 밝혀주는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이 함께 모이사로 전개되는 것은

그 모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와 함께 모였다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모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이신 반면

제자들은 하찮은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배움이 부족하고 헛된 욕심도 많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제자들과 함께 해주심으로

거기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모여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교회는 존재할 수도, 존재할 이유도 없습니다.

교회의 근거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모인 제자 중에는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어부가 있는가하면,

마태와 레위처럼 세리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 역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열심당원이란 로마제국으로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도 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전혀 이질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겨울 한파보다 더 매정한 세리들에게 온갖 착취를 당하던 어부들이

어떻게 그 세리들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겠습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기 삶을 던진 열심당원들이,

로마제국의 하수인이 되어 동족의 고혈을 짜는 세리와

어떻게 한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열심당원이 역사의식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갈릴리 어부는

전형적으로 자신의 삶 외에는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역시 열심당원과 갈릴리 어부가 같은 모임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불가능을 뛰어넘어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들은 한데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때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주위가 늘 이와 같았습니다.

산헤드린 의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

로마제국 장료인 백부장이 함께 있었는가 하면,

비천한 빈민과 불치병 환자에 밤거리의 창녀도 있었습니다.

물과 기름같은 사이일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함께 모시라로 번역된 헬라어 쉬날리조

함께 모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구심점이 되어 함께 불러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쉬날리조함께 식사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주님은 단지 무미건조한 이벤트로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함께 식사를 나누며 진정으로 어울려 주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으로 인해 이질적인 제자들은 주님 안에서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과 모이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고,

그들과 더불어 교회를 이루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그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쉬날리조는 성경 전체에 오늘 본문에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단어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능력으로 이런 일을은불가능하고,

이질적인 인간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내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질적이고 추한 인간을 살려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신 주님만이

이 일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이질적인 모든 인간을 위한 참된 구원자가 되시며,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주님안에서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향끼리의 사람들만 모이면 선교회나 친교회일 수 있어도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만든 시간이 다르고 사용하신 재료가 다르며,

만들어진 구조가 다릅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부모와 같지 않습니다.

쌍둥이 조차 다릅니다. 하물며 같은 교회에 다닌다고

모든 교인이 다 똑같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백이면 백 다 다릅니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외의 사람은 모두 자신과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와 자신 사이의 거리,

상대와 자신의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왜 그의 곁에 있어야 하는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나를 그의 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가 나의 동료인가?

주님께서 그와 나를 함께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교단과 교파의 배경이 서로 다른 우리가

새생명교회를 이루어야 하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함께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박정관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형제의 모습 속에찬양이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주님께서 한자리에 함께 모이게 하신 사람들이 누구든

주님 안에서 서로 다름을 존중하며 더불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실상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과 교회를 통해서가정,일터,사회를 통합시켜가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