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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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7장 - 사랑아! 속하였나니!

  • 느헤미야강
  • 201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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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공동체인 가정을 이루는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가서 안에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나던 때, 아담이 하와를 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했던것처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도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열정적인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가서 7장을 읽으면서 라는 표현에 아내를, 제 자신을 넣어서 읽어보니 참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신체의 각 부위를 언급하며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만남이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진실한 마음과 한결같은 사랑, 술람미 여인과 깊은 만남이 있었기에 술람미 여인의 모든 신체가 다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그 의미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과 솔로몬을 향한 술람미 여인의 고백이 잘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의 대표적인 것이 6절입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6절에서는 술람미 여인을 '사랑아'라고 표현합니다. 술람미 여인을 향한 다양한 신체부위에 대한 표현의 가장 큰 절정은 사랑아입니다.

사랑의 의인화가 이루어져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은 매우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물리적인 떨어짐이 이 둘을 갈라놓을 수 없으며, 이 둘의 인생은 둘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치 둘이 한 몸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말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특별함 때문입니다. 이 특별함이라는 규칙이 깨지게 되면 그 이후로 사랑은 고통이요 아픔이 됩니다. 

솔로몬의 고백에 대한 술람미의 고백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10절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속하였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랑에 대한 자유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잃음이 과연 행복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진정한 행복은 자유를 잃음에서 출발합니다. 

미혼 청년들의 주된 대화의 주제중 하나는 결혼입니다. 30년 안팎의 시간동안 미혼으로 얼마나 자유롭게 살았겠습니까?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전국이 좁다 하고 아니 세계가 좁다하며 다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의 간절한 소망은 그런 자유보다 누군가에게 귀속된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마음껏 누린 청년들은 이제 결혼이라는 구속 안에 갇히고 싶어합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아이가 없는 가정들은 얼마나 아이를 원하고 있습니까?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아이없이 부부만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롭습니까?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는 달콤한 잠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모든 삶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기 인생이 사라지고 오직 아이에게 귀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혼자서 사는 것보다 아이를 키워내는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지금부터 영원토록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전문용어로 '백수'라고 부릅니다. 몇 시에 자든, 몇 시에 일어나든 누구하나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겠습니까? 그런 삶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폐해지고 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한 직장에 귀속되어 열심히 일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낸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일할 수 있음이 우리에게 행복입니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것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여겨지나 실은 그 속함 때문에 누리를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속한바 되었다고 고백하는 이 선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반응해야 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해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자입니다.

사랑아, 속한자. 이 두 고백이 상호간에 인격적으로 연결될 때 모든 관계는 이어지게 됩니다. 

주님은 하늘보좌에 앉을 자유를 포기하시고 친히 이곳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자신을 가두셨습니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참 생명이 주어졌고,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죄로 물든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의 삶에서 부부가 사랑아, 속하였나니 라는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도 이런 고백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술람미여인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는 고백과 더불어 들판에서 은밀한 관계를 갖고 싶다는 것, 이어 합환채를 준비하였으니 더 깊은 관계를 나누는 자 되고 싶다는 이야기가 매일 매일 하나님과 말씀으로 은밀한 관계를 갖는 모양으로 묵상하니 더없이 의미있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루의 삶속에서도 가정안에서도, 교회 공동체안에서도 이 사랑과 속함의 관계가 말씀으로 이어지는 귀한 삶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