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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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장 - 여호와의 종의 노래
- 느헤미야강
- 201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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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장부터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네 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42,49,50,52-53장입니다. 이사야서에 4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42장은 40~41장을 배경으로 해서 나왔습니다. 이사야 40, 41장에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시면 바벨론과 열방들, 우상들이 우리를 그대로 놔두겠는가?’ 이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은 열방들과 우상들에게는 어떠한 능력과 지혜도 없다고 선언하며 창조주 하나님, 만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우상과 똑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시는 메시지가 42장 내용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 돌린다면 그것이 우상이며, 죄악 중에 가장 큰 죄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42장은 여호와의 종을 노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성품을 통해 위로하며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1).
주목할 단어는 붙드심, 기뻐하심, 택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으시고 기뻐하며 택한 존재가 여호와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종의 특징이 2,4절에 나옵니다. ‘그는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이게 하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불을 끄지 않으신다. 쇠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면서 사명의 핵심은 정의를 베풀고 행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곳에서의 정의는 법정용어로 거짓을 거짓으로 드러내고, 진실을 진실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정의란 40,41장으로 연결되듯 우상은 거짓이요, 악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생명과 보존을 주시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 건져내시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세우는 것은 열방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상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인간의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돌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정의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사명도 역시 정의를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라는 것이 오늘 여호와의 종의 노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성경의 증언은 1절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곧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진 존재였기 때문에 종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영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다른말로 그 중심에 하나님으로 채워진 존재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중심에 있었기에 그 삶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기에 놓칠 수 없는 핵심은 중심과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확연하게 두 종류의 부류로 구별되는 존재들을 말씀합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정조준하는 바른 신앙의 자리를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존귀를 누린자들이 있고, 자기욕망을 겨냥하여 자기중심을 고수하다 끝내 괴롬과 고통으로 멸망한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노아와 동시대 사람들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하나님을 정조준하여 믿음을 지킨데 반해 나머지 사람들은 욕망의 자리에 집착했습니다. 노아와 가족은 멀쩡한 날, 날새기 무섭게 배를 만드는 한심해 보이는 자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40일 밤낮 쏟아지자 사람들은 급기야 높은곳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력을 다해 올랐지만 가장 높은 산마저 삼켜버린 홍수물은 그것보다 15규빗(6.8미터 내외) 더 높이 올랐습니다. 결국 자기 중심성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멸망당했습니다.
노아 가족은 홍수가 구원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높이 오른 곱보다 15규빗 더 높이 올았습니다. 중심성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 같은 삶 방식인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과 롯은 하나님 중심성과 자기 중심성의 대표적인 부류입니다.
롯이 욕망을 정조준하니 눈에 보이는데로 나아가 머문곳이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진 뒤 하나님께서 동서남북 바라보는 땅이 네 것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 않았습니다. 헤브론 마므레에서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 마므레는 뜨거운 뜻이니 하나님과 뜨거운 교제의 자리로 나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성에 두었기에 나온 태도입니다.
동일한 공간에 있다고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동일한 예배당에 있다고 다 같은 성도는 아닙니다.
같은 선교회, 속회에 있다고 다 신실한 크리스챤은 아닙니다.
참과 신실, 참 성도, 참 크리스챤은 공간이 아니라 중심에 의해서만 가려집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고수해야 할 믿음의 자리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마음 중심입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면 압니다.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나를 불러들이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거짓과 불의, 원망과 불평과 벗하는 자들이 나를 불러들이면 나 역시 그런 사람입니다.
오직 바르고 참된 삶을 살기원하는 자들이 두팔 벌려 나의 도움을 요청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진정한 크리스챤입니다.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는 그 중심에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으며, 이방여인을 위해 은혜의 부르러기를 남기셨습닏. 서기관같지 않은 권세 있으셨기에 소리높일 필요 없었습니다. 속이 하나님으로 가득하면 소리내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아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성으로 읽으니 8절 말씀이 이렇게 읽혀집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네 삶의 중심이 다른 자에게 가지 않기를 바란다. 내 중심을 우상에게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내 우상이 드러나 보인적 없으나 다른 자라면 걸리는 것이 참 많습니다. 부서지지 못하고 속에 경고하게 모셔둔 속사람이 여전히 주되신 예수님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소리 내지 않아도,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상한갈대, 꺼겨가는 등물을 꺾지 않고 끄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처럼 중심성에 오직 하나님만을 둘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목숨처럼 지키고 가꾸어야 할 것 그것은 중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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