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욘4장-나의 박넝쿨이 사라지는 것이 은혜인 까닭

  • 느헤미야강
  • 2018-07-07
  • 686 회
  • 0 건
1. 
3장에서 요나가 니느웨에 단 하루동안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외국도 아닌 자기 백성에게 자기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선지자들을 때리고 가두어 예언을 하지 못하게 했고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악독함으로 유명한 니느웨 사람들과 왕은 그 말씀 앞에서 순전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하는 거짓 회개가 아닌 모든 행악에서 돌이키는 회개로 반응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참됨을 보시고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셨습니다(10). 
사람은 그가 행한 악으로 인하여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합니다. 
은혜이자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이후의 역사는 앗수르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멸망하게 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회개가 심판을 면하게 했지만 죄악으로 인해 결국 멸망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입으로 잘못을 뉘우침에 있지 않습니다.

고백한 것이 삶으로 어떻게 투영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많은 회개의 삶을 살지만 삶으로 드러난 회개는 흔치 않습니다. 
만일 앗수르에게 적용되었던 은혜와 심판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온전한 회개의 삶이 아님에도 살아남아 있 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매순간마다 기억하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2. 
4장을 넘어오면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지 않기로 뜻을 돌이키신 것이 요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1). 
요나의 태도는 우여곡절 끝에 순종하여 니느웨에 와서 심판 메시지를 전했던 요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나는 보통 싫어한 것이 아니라 ‘매우’ 싫어했고 하나님께 성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 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커서 돌이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불순종했다고 말합니다. 
즉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심으로써 니느웨가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요나와 하나님의 차이였습니다. 

3.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요나가 알았다고 하나님의 마음까지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사되었다고, 신앙의 경륜이 오래되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예배, 기도, 헌신, 전도가 무엇인지 안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행동하는 것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영혼구원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전도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요나가 그랬고, 우리가 요나일 수 있습니다.

4.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순종이 아닌 불순종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보내신 자리는 니느웨인데, 그가 있고 싶은 곳은 다시스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 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예배, 기도, 전도, 섬김, 헌신, 베품과 나눔, 그리고 가정과 일터. 그곳이 우리의 니느웨입니다. 
반면에 내가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자리가 있습니다. 
거절, 불순종, 나태, 게으름, 적당한 안주... 그곳이 우리의 다시스 아닐까요?

5. 
요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자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내 생각과 다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화내는 것들이 합당할까요?

6.  
요나가 선택한 것은 앉아서 니느웨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망하는 것입니다(5절).  
성난 요나를 향한 하나님은 세가지를 예비하시고 보여주십니다. 
박넝쿨, 벌레, 동풍을 예배하셨습니다. 
박넝쿨을 통해서 큰 그늘을 만들어 주심으로 괴로움을 덜어줍니다(6절). 
요나의 마음을 이 일로 인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7. 
이제 조금은 편안해진 요나를 하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이튿날 새벽, 요나가 기뻐했던 박넝쿨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작은 벌레를 예비하사 박넝쿨을 밤새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뜨거운 동풍으로 아침 해를 더욱 뜨겁게 요나에게 비추게 하여 
요나는 다시 죽기를 구할만큼 고통스러워 합니다(8).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상한채로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박넝쿨이 없어진 것으로 네가 성낼 권리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 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0~11).” 

8.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를 보게 합니다. 
요나는 박넝쿨의 안락함이 그에게 기쁨이 되었으나 그것이 제거되었을 때 불평과 원망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니느웨의 십이만여명의 영혼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요나서가 마무리됩니다.
요나에게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박넝쿨이 중요하나
하나님께는 죽어가는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을 대조해 보여주십니다. 

나가 박넝쿨이 주는 안락함에 자신을 기댈때에는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사라졌을때에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십이만명이라는 영혼입니다.

우리는 바른 신학을 배우고,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귀중히 여기는 가치와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가치가 다를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아끼셨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박넝쿨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가치를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을 고수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허울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박넝쿨이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의 시야는 열려 하 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가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박넝쿨이 사라지는 것이 은혜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