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마태복음 17장_산 아래의 영성

  • 느헤미야강
  •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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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빌립보의 가이사랴에서 더 북쪽으로 가셔서

세 제자들만 데리고 어느 산에 이르십니다.

세 제자는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함께 대화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는 주님, 모세,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세 사람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 하셨습니다.

 

엿새 전에 고난 받고 죽을 것이라는(1절) 예수님의 말씀에 대들었던

베드로에게는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에 앞서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명하게 보여 주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놀라운 영광스런 변형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분명한 확신과 지식을 얻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과 모세, 엘리야가 나눈 이야기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한 내용이었음을 생각할 때

주님의 영광은 고난과 함께 임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함인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영광을 놀랍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산을 내려 오시면서

당신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9).

부활로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보기 전에는

이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기관이 말하고 제자들이 궁금했던

메시야가 오기전에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세례요한임을 깨닫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귀신들린 사람을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나무라시며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오라 하시고는 귀신을 쫓아내어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이어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권세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21절 없음으로 되어있는 구절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같은 평행본문인 마가복음 929절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22-23절은 장차 고난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자 그 뜻을 알지 못한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24-27절에 가버나움에 이르렀음 때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모든 성인 유대인은 한 해에 반 세겔(성인 노동자의 이틀 품삯)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자녀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잡음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낚아 특별한 방법으로 돈을 구하여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나누고 싶은 도전과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당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신비한 방법으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불쑥불쑥 보여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세 제자가 경험한 것처럼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시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덜 극적이고 덜 분명한 방식으로 드러내십니다.

어떤때는 은밀하고도 조용한 가운데 임하십니다.

믿음이란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보고

그분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로 흘러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황홀경을 사모하고 추구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체험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들의 초점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체험을 주신다면

그것도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홀한 체험 한 번 없었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체험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 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지는 자리에 계속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위에서의 놀라운 경험의 자리가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에는 귀신들린 아들을 치유하기를 원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산 아래에는 인생의 수많은 아픔과 고통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산 위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지라도

그곳이 우리가 계속 머물 자리가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오라 하십니다.

은혜와 축복의 경험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치열함과 수고로움이 있는 곳에서

아파하고 회복되기를 원하는 이들을 향해

사랑의 몸짓을 펼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취할 영성은 산위가 아니라

산 아래 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산 아래의 영성입니다.

 

산 아래의 영성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본문의 21절은 없음으로 되어 있으나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929절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믿음이 적다는 것과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낼 수 있다 하셨습니다.

겨자씨의 핵심은 작은것이지만 생명이 포인트입니다.

삶이 비루하고 약하고 한없이 부족한 존재일지라도

그 안에 예수 생명이 있으면 산 위의 영성을

산 아래에로 옮겨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 큰 믿음이란 이런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함께 내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으로 산 아래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이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예수 생명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될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은과 금은 많아졌으나

예수님의 이름,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한탄이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한탄은 아닐까싶습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이 잃어버리는 것 중 하나가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허둥대며 뭔가에 쫓겨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사탄의 작전입니다.

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차단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재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 것인가?

내 힘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 것인가?

나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결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승패는 얼마만큼 기도생활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접속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산 위의 놀라운 경험은

산 아래에서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과 날마다 접속될 때

비로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