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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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27장_선택; 바라바냐 예수냐

  • 느헤미야강
  • 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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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은 가룟유다의 죽음, 심문당하신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고 고난당하시는 모습

예수님의 죽으심과 목격자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고 돌무덤에 안치되고 

경비병이 지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인류 역사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판정에 끌려나온 예수님을 두고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선동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죽이게 하자'

 

선동당하는 무리들은 그렇다치고,

선동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던

최고의 종교지도자, 대제사장들이였습니다.

모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빌라도와 무리들과의 대화입니다.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로소이다' (21)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2)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인데,

사람들이 그 왕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있습니다.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이냐?' 조롱하면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죄패까지 부치면서,

그렇게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왕이신 분이 악하기로 유명한 죄수 바라바와 비교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흉악한 죄수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메시야가 아닌 줄 알고 그랬을텐데...,

절대 이런 사람이 메시아일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그랬을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정말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본문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거기 있었으면 달랐을까요? 함께 소리쳤을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오히려 그 자리에 없었던 일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그럴까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수없이 이런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바라바냐? 예수냐?

지금 나에게 이렇게 물으면 답은 당연히 예수입니다.

머리로는 당연히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대신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것 말도 안되는 선택입니다.

머리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 우리는 매순간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왜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이는 잘못을 저질러야 했습니까?

 

첫째, 영적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없이 종교생활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경배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전혀 없이,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채,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는 그들이었습니다.

전통과 계명과 형식과 습관에 치우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거룩해 보이는 외식적인 그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는 맹인이었기에 버젓이 눈을 뜨고도 몰라보았습니다.

다 보고 경험하고서도 몰라보았습니다.

 

둘째,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8)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에는 근본적으로 시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시기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시기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더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더 높아지고 인기를 얻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의 속에 있는 그 시기.... 겉으로는 시기라고

절대로 표현하지 않지만 들여다보면 결국 뿌리는 그것입니다.

시기가 미워하고, 밀어내고, 편을 가르고, 모함하고,

비방하고, 쫓아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상대가 예수님이어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두 가지입니다.

영적 무지와 시기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우리도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 무지와 시기심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욕하고 심지어 죽이는데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

실제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 사람,

예수님 앞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 종교생활만 하는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로

하늘 하나님이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 동기는 사람들의 이런 영적 무지와 시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다 아시면서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이 길을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우리라고 저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도 무지하고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인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사는 법은 영적으로 더욱 깨어서

더 가까이 주님 모시고 사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바라바냐? 예수냐? 세상이냐? 예수냐?

우리의 대답은 오직 '예수'이어야 합니다.

 

27장은 가장 비극적인 장면인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은혜로운 본문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어디까지 낮아지실 수 있으셨는가를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 낮아지심은 오직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심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낮아지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주시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고 사는 것만이

그분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