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요한 12장_ 냄새 가득하더라
- 느헤미야강
-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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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려 놓았고 아예 죽이고자 하는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안 오실것이라 단정지었습니다(요11;56절).
그럼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고
이곳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있는 곳이이었습니다(요12;1).
이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요12;2)
마가복음 14;3절은 이 잔치가 문둥이 시몬의 집임을 알려줍니다.
수많은 사람중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고,
많은 동네 중에서 유독 베다니를 선택하시며,
많은 집들 가운데 하필이면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루살렘 입성 전날을 묵으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듯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을
죽음과 무덤으로부터 풀어 놓아 영원히 살리시며,
문둥이처럼 썩어 문드러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게 되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엿새 전에 토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문둥이처럼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내 영혼을 살려 주시기 위해,
언젠가는 관속에 누워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나 같은 죄인을 무덤과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살리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 확신하던
그 죽음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거하셨던 주님께서
성탄절에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친히 찾아오셔서
지금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찾아주신 주님께
우리는 어떤 삶으로 응답해야 할까요?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를 한근이나 가져와서 주님의 발에 부었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그때 그 집이 온통 향기로 가득했음을 본문이 밝혀주고 있습니다(3).
나드 향유는 당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가 아름다운 향기를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 향유의 향기때문이 아니라
그의 드림과 헌신이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비롯되는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잔치를 할 때 주인공의 머리위에
향유를 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나사로를 살려셨던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이니
당연히 주인공은 예수님이었고 마리아가 향유을 부어드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 노동자 1년치의 품삯에 해당하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4,5)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 배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향유의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최상품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 유다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도적이기때문이라 전합니다(6).
유다가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은
주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자기 욕심때문이었습니다.
물질에 노예가 된 사람은 절대로
주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도, 사람도,
그의 부를 축적시켜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
사람을 정말 사랑해 본적이 없는 자는
사랑이란 곧 낭비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절약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향유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바친 마리아와,
추한 욕망속에 영과 육이 썩어 문드러진 유다입니다.
사랑은 낭비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임을 보여준 마리아와
지식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욕망으로 뒤덮인 유다입니다.
마리아의 낭비같은 드림앞에서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그 같은 행동을 통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낭비로 시작되지만
결코 낭비로 끝나지 아니하는 것은
낭비로 이루어진 사랑은 이처럼 주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모양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번만큼은 예수님은 절대로 예루살렘에 오지 않을거라고
확신한 순간 예수님은 오직 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음의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낭비하셨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낭비하신 예수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우리 역시 자신을 낭비하는 사랑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그 때에만 주님께서 결과를 책임져 주십니다.
성탄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로,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느 쪽의 사람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리아인지, 가룟유다인지 말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향유를 주님의 발 앞에 부어드리는
성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성탄으로 오셨고
자신을 송두리째 낭비하셨던 주님의 사랑속에서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낭비함으로 사랑해야 할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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