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간절한 기도, 은혜가 충만한 말씀,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새생명교회입니다

행전16장_루스드라에도 이르매

  • 느헤미야강
  • 2019-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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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6() 새벽기도회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행전 16>

 

실라와 2차 전도여행을 하는 바울은 고향 다소를 거쳐 더베,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는 수리아 안디옥 북쪽을 지나 서쪽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그 사이에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이 험산준령을 실라와 같이 걸어갔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3번 이 산맥을 넘었습니다.

 

첫 번째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유학길을 갈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15세가 되면 성지순례를 하게 합니다.

바울 역시 다소에서 700km 떨어진 예루살렘을 성지순례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수학했습니다.

어린나이에 성지순례를 하고, 최고학자의 제자, 지도자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 산맥을 넘을때는 희망의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길에서 가말리엘 제자, 유대교 지도자 되어 한 일은 

예수님을 부정하고, 교회를 짓밟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거였습니다.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낙향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전도자의 삶을 원했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배교자로 단정지었고 살해 위협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지자 고향 다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마누스 산맥 넘은 바울이 낙향을 위해

그 산맥을 넘을때는 실패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주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기 위한 재창조의 길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그 후 13년이 지난 후입니다.

13년을 다소에서 칩거하여 주님의 손에 의해 빚어졌을 때

안디옥교회의 바나바에 의해 공동목회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는 목회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상치 못한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 번째로 산맥을 넘었습니다.

감격적인 행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차전도 여행을 위해 네 번째로 이 산맥을 넘어갔습니다.

1차전도 여행과는 달리 유럽대륙까지 건넜습니다.

유럽과 인류를 새롭게 하기위해 건넜습니다.

주님 섭리에 자신을 맡긴 믿음의 행진이었습니다.

바울은 4번에 걸쳐 반복해서 아마누스 산맥을 넘었으나 각각의 의미는 달랐습니다.

 

자기 야망으로 넘은 때는 하나님과 정반대의 길이 되었고

자기를 해하는 일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산맥을 넘을때마다 의미는 새로워졌습니다.

산맥을 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보면 매일 반복된 동일한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산맥을 넘는 사람들입니다.

역시 무엇을 위해 반복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자기야망을 위해 자기 인생의 산맥을 넘는다면

하나님의 길과는 반대의 길, 자해행위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동일한 인생 산맥을 넘어도 주님을 위해 넘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닌 그 의미는 확장을 거치게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매일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1절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도라는 말이 루스드라에는 그냥 들른것처럼 되어 있으나

본래는 더베와 루스드라를 목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지를 재방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가 1차전도 여행순서대로 구브로를 선택했기에

바울은 육로로 1차와는 반대방향으로 가서

1차 마지막 방문지인 더베와 루스다라를 처음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참으로 큰 감동을 줍니다.

더베, 루스드라!

 

1차 전도여행때에 더베, 루스드라에서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행전158절을 보면, 루스드라에서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려 했으나 바울이 만류했습니다.

그후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올라와 그곳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에게 돌팔매질을 하여 그 상처가 너무심해 

실신한 바울을 두고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성밖으로 내 팽게쳤습니다.

그 상황에서 살아난 바울은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베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고향 다소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때야말로 가족품으로 가고 싶을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자기 안일을 위하여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견고히 세우고자 오던 길을 되돌아 갔습니다.

 

2차 전도여행의 첫 출발지로 바로 그곳을 간것입니다.

죽음의 돌팔매질을 당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루스드라에 살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힐일이 있으면 역시

죽음의 돌세례를 베풀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2차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발로 찾아갔습니다.

죽음의 자리로 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님 부르심에 대한 소명과 사명의식이 현실의 위험보다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부르신 분은 인류의 죄 값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한

어떤 현실의 위협도 바울에게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바울을 통해 인류역사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부르신 주님은 우리 각자를 부르신 그 분입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위협속에서도 소명과 사명의식으로 바르게 산다면

바울처럼 한 시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다 해도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의 사명의 루스드라를 향하여 기꺼이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