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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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19장_말씀이 힘이 있어
- 느헤미야강
- 201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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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9(토) 새벽기도회
말씀이 힘이 있어 <행전19;13-20중심으로>
행전19장은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과 사건들입니다.
2,000년전 에베소는 영적, 육적으로 타락의 극치를 이룬 도시입니다.
로마제국의 4대 도시로 소아시아 최대도시입니다.
지정학적 요충지로 돈, 사치, 향락의 도시입니다.
에베소는 주후263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기까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린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은 풍요와 다신의 여신입니다.
길이가 130미터, 폭이 67미터, 그 신전을 바치는 기둥이 127개입니다.
그 거대한 신전에 있는 수천명의 여사제들은
돈받고 합법적 매음을 하는 창녀입니다.
신전 노예는 셀수 없을 만큼 많았고,
아데미 신전을 참배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제는 그들에게 각종 금품을 뜯어냈습니다.
신전안은 치외법권지역으로 어떤 범죄자도 그 안에서는
체포 구금이 불가능해서 범법자들로 넘쳐 났습니다.
무당과 마법사 천국으로 온갖 부적이 난무하는
아귀다툼의 도시가 에베소였습니다.
그런데 온갖 사람들이 아귀다툼하는 장소에
바울은 그곳을 벗어나 자신을 격리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에베소 사람과 선을 그어 구별하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 한가운데서 부대끼며 살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시 시작했고,
막연히 믿던 사람들도 죄를 자복하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때 마법사들은 돈 벌이의 원천인 마법책을 들고 나와 불태웠습니다.
사람들이 그 책값을 계산해보니 총액이 은 5만 드라크마였습니다.
한 사람이 137년 동안 일해 얻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난 마법사들이 그들의 삶의 수단인
마법책을 불살라버렸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 한 사람으로 혁명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귀다툼이 일어나는 에베소에 바울 한 사람이 들어갔는데
그들과 섞이기는커녕 수많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20절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가르쳐 줍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우상, 타락, 미신의 도시에서 생명의 역사가 바울 개인때문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주의 말씀이 지닌 능력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역사속에서 어떤 권력자도 그들의 힘은
한순간 정점을 지나 소멸했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힘도 시차만 있을 뿐 물거품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힘은 세상의 힘과 같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점점 증가하는 것은
힘의 주체이신 주님이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주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세력을 얻었다’는 것은 ‘이스퀴오’, ‘이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5,16절을 보면 유대인 무당이 바울을 흉내내어
예수 이름을 주문삼아 귀신 다루려 하다
악귀들린 사람에게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악귀들린 사람은 한 사람인데 스게와 그의 일곱 아들이 맞붙었는데
가볍게 이겼습니다.
여기에서 이기다로 사용된 단어가 ‘이스퀴오’입니다.
그러나 그 악귀도 주님 말씀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주님은 세상 어떤 힘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 힘,
다함없는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세상 무엇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데미 신전을 찾아가 보면 옛터에
단 한 개의 흰 대리석 기둥만 남아있습니다.
무소불위의 힘이 고트족 침입으로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반면에 그 에베소에서 2,000년전에 바울이 전한 주님의 말씀은
오히려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합니다.
주님 말씀의 힘이 인간을 압도하던 아데미 신전의 힘을 이긴것입니다.
2,000년전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건재했고
모든 사람에게 그 영향력과 지배력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마법사들이 바울이 전하는 주님 말씀에
그동안 자신들이 보아왔던 아테네 신보다
힘 있음을 안 순간 미련없이 돌아섰습니다.
주님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이 지닌 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의 힘을 믿지 못하면 누구든지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려고 한 것에 있습니다.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말씀을 의지하여 열심히 살고
오늘날까지 믿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시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
고난당한 것이 유익일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말씀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금은보다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속에는 세상의 고난, 역경도
소중한 영적 자신으로 승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아니고서는 세상에서 우리 생명을
건져올릴 수 있는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무리 할 즈음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변화된 모습과 모세, 엘리야가
내려와 대화하는 황홀한 광경을 보았습니다(마17).
베드로는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모세,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과 산위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언반구 대답않으시고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 오심은 외딴곳에서 홀로 고고하게 사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귀다툼 하는 세상에서 죄인과 부딪치며 생명을 나눠주시기 위한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통이, 절망, 어둠, 죽음이 주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이기고 부활하셔서 요한복음 16;3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세상에 사는동안 어떠한 환란, 역경을 당해도
말씀으로 평안, 담대히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탄, 세상의 절망과 모함을 이기고,
십자가 고난을 피하려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시고,
모든 것 삼키는 죽음을 이기시고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목표는 세상과 격리가 아닙니다.
외딴곳에서 고고하게 살아가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목표는 세상에서 몸을 부딪끼며 그리스도 증인으로 사는데 있습니다.
지금,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있습니까?
지금 만신창이 피투성이 입니까?
지금 숨 쉬기 어려울정도로 절망의 나락에 있습니까?
지금 헤쳐 나올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이 있습니까?
지금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모함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절대적 평안으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기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말씀은 영원한 힘입니다.
말씀은 세상 이기고 정복하신 힘입니다.
믿음은 그 주님 말씀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힘 입어 나홀로 고고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귀다툼하는 세상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증인됨의 삶이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새생명교회와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있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증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100전 100패 했을지라도 주님 말씀 힘 입으면 바울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100전 100승할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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