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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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전20장_소요가 그치니 작별하고 떠나

  • 느헤미야강
  •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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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옴으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의 생업이 위협받자 큰 소동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때에 에베소 행전관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고 사람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그리하여 바울과 일행들은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눈에 볼때는 행전관인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두 가지 다 볼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의식못해도 우리안에서, , , 옆에서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섭리해 주셨기에 오늘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꿰뚫어 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며

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모든 소요사태가 그치자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매듭짓고 다음행선지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불러 권한 후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2차전도 경로였던 빌립보, 베레아, 데살로니가,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본문을 통해 주목하게 된 것은 작별하고 떠나라는 구절입니다.

작별하다포옹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년동안 정든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 일일이 포옹한 후에 떠났습니다.

그후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을 방문하고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마지막 유훈을 남깁니다(20;17).

그리고 바울은 다시는 에베소를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과의 작별이 마지막 이별인 셈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할때가 50대 후반이었습니다.

에베소에 머문 기간이 3년입니다.

 

어떤 인간의 생애에서 3년은 기억에서 지워진 무의미한 시간일 수 있고,

어떤 인간의 생애에서 3년은 세월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간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3년은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에게 지울 수 없는 3년이었습니다.

3년동안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16장이나 되는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신약성경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언행도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말, 행동, 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에베소에서의 3년은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영원으로 승화되었고 감동을 줍니다.

 

2,000년전 바울과 함께 3년동안을 살았던 에베소 성도들은 얼마나 영향을 받았을까요?

작별하여 떠나보낼 때 얼마나 허전하고 허전했을까요?

바울 삶이 에베소에서의 3년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후 전생애가 그랬습니다.

로마에서 참수당하여 죽을때까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든지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말, 행동, 글은 2,000년이 지난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까지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바울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나

그를 통해 역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는 한 천년만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 인생에서 지난 3년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태어난 후 몇 년을 살았든지 우리의 전 인생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단지 3년만이 아니라 전생애가 기억에 조차 지워져 버린

무의미한 시간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생애가 하찮아 보여도 우리가 주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왔다면 우리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시간마저

주님의 시간속에서 절대적 의미로 승화될 것입니다.

 

성경 66권중 사람이 이름이 제목인 것이 41권입니다.

39명이 남성, 여성이 2명입니다. 에스더와 룻입니다.

이 두 사람은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 만 21년을 페르시아의 왕후로 살았습니다.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를 자기 일신이나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로 왕에게 나간 끝에 유대인을 살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행전이 말씀에 기록되었고 이름이 제목이 되었습니다.


룻은 보잘 것 없는 여인입니다. 에스더보다 500년 전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이 사람취급도 안하는 모압여인입니다.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과부를 연약한 인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세상 모든 여인중 신분 높은 여인의 샘풀이라면

롯은 세상 모든 여인중 하찮은 여인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룻이 민족 영웅도 아닙니다.

일평생 행한 일은 크게 드러난 일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시어머니를 모신 것,

효심에 감복한 시어머니 나오미가 재가를 시켰고,

아들 낳아 키운 것 밖에 밥하고 빨래한 것 외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주부입니다.

평범한 주부 룻이 어떻게 에스더와 함께 성경 책의 제목으로

기록된 단 2명의 여인중 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룻기의 마지막 장을 보면 그녀를 통해서 이새가 나오고

다윗이 나오게 되는 족보를 보여주고,

마태복음에서는 이 족보가 예수님의 족보임을 알려줍니다.

 

말씀이 은혜인 것은,

성경의 눈으로 보면 목숨걸고 민족을 구한 에스더나,

이방여인으로 밥, 빨래한 평범한 가정주부인 룻이나

하나님중심으로 살아가는 한 똑같이 평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 보기에 하늘, 땅차이만큼 큰 차이나는 사람들을 동일하게

성경책의 제목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주신 두 눈으로 우리 각자 모습을 보고,

또 한 눈으로 언젠가 세상 떠나게 될 모습을 보십시오.

현재 모습이 어떠하든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바울처럼 자신과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게

영적인 한 획을 주고 떠나기 원하십니까?

지금부터 자신의 말, 행동, 글이 하나님안에서 승화되게 하십시오.

 

에스더처럼 존귀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교만하지 마십시오.

자신 모든 것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민족, 인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반대로 룻처럼 주부의 삶 외 아무것 없어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맡겨주신 사명자리를 하나님 경외함으로 지켜가십시오.

오늘 진리를 지키려다가 모함당하고 불이익당해도

포기말고 꿋꿋하게 걸어가십시오.

 

룻이 세상과 작별한 후 지금까지 3,000!

에스더가 세상과 작별한 후 지금까지 2500년이 흘러갔고,

바울이 세상 작별한 후 2,000년이 경과했어도,

그들이 세상에서 산 세월, 삶은 주안에서 영원히 승화되어

오늘날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세상 떠나는 날 역사의 지평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지금도 동일하게 사람들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