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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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특새(3) 깨어 있으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마25장
- 느헤미야강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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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목)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3)
깨어 있으라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25;1-13>
25장 전체나눔(열처녀 비유, 달란트비유, 양과 염소비유)
마태복음 25장은 마태복음 순서상 고난주간 마지막 비유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와 같다 하리니’(1)
유태인은 결혼시에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신부집으로 갑니다.
신부집 동네 어귀에 사람들은 신랑을 맞기위해 기다립니다.
그때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들고 맞으러 갑니다.
결혼식은 동네 축제입니다. 이때에 신랑친구들도 옵니다.
신부친구들도 서로 들러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신부가 친구들을 선택하는데 10명을 택합니다.
그러면 왜 등을 준비합니까? 신랑은 밤에 올까요?
유대인은 일몰 시간을 새날로 잡기 때문에 해가지면
그때부터 새날이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밤에 오는 것은 새날에 오는 것입니다.
밤이니 등불이 필요하고 신랑이 신부집으로 올 때 들러리가
들고있는 10개의 등불은 하이라이트 장식품이 됩니다.
본문 2절은 다섯명은 지혜롭고, 다섯명은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는가 아닌가입니다.
집안에 켜는 등불은 크기가 커도 상관없으나 휴대용 기름통은 작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자동차, 시계, 전화 없으니
신랑이 어느날에 출발하는지는 알리나 도착할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들러리들은 여분의 기름 준비는 필수입니다.
5명은 등불에 기름차있다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미련하다고,
반면 9절,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여인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했습니다.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고, 한밤중 기다리다 졸고 있는데
신랑이 왔다는 소식이 들립니다(5,6).
들러리들이 일어나보니 등불은 기름이 다 되었습니다(7,8).
기름을 별도로 준비하지 못한 5명의 들러리들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들러리들에게 나눠달라고 하자
슬기 있는 자들이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니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오라 했습니다(9).
언뜻 보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명의 들러리들이
심보가 별로인 것 같습니다.
인식하다 싶고 꼭 그래야 되나 싶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들러리는 나를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랑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입니다.
멀리서 오는 신랑을 동네어귀에 기다리다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집에 안내합니다.
그런데 신부들러기가 기름 인심을 잘못쓰면
신랑을 인도하기가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혹 동네 어귀에서 신부집까지야 등불 밝히 수 있다해도
신부 결혼을 위해 10개의 등이 어둠을 밝혀주기는 어렵습니다.
나누다 보면 중간에 다 꺼지면 낭패가 됩니다.
어리석은 들러리들이 한밤중 잠자고 있는 기름 가게 주인을
겨우 깨워 기름을 사오니 결혼식 집 문이 닫혔습니다(10,12).
등불은 결혼식을 돋보이기 위한 것인데 마땅히
준비할 것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들러리의 정체성을 망각한 것입니다.
결혼식 자체를 망친 것이 됩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도착했습니다.
들러리 10명이 등불을 들고 안내해야 그 결혼식 돋보이게 됩니다.
미련한 사람들 때문에 등 5개만 켜져 있으니
축제 분위기가 망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이 문을 안 열어 준 것입니다.
13절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매듭을 이렇게 짓습니다.
‘깨어 있으라. 그날과 그 때는 모른다.’
5절에 들러리들이 다 졸며 자고 있었으니
깨어 있으라는 말은 단지 눈 뜨고 있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깨어있음과 기름을 준비하라가 간은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 비유를 말씀하신때가 언제입니까?
마태복음 24;3절에 제자들이 종말은 언제 올까요?
그 징조는 무엇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답변이 24장 내용이고, 그것을 설명하신 후 25장에
‘깨어 있으라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날과 그때는 종말의 때를 말합니다.
미련한 다섯명처럼 말고 슬기로운 다섯명처럼 되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종말은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재림 하시는 우주적 종말입니다.
모든 역사가 끝나는 날입니다.
둘째, 개인의 종말입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입니다.
두 종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날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때도 아무도 알 수없습니다.
죽을 사(死)는 하나(一), 저녁 석(夕), 비수 비(匕)입니다.
죽음은 어느날 저녁 비수같이 날아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낮에 오면 보고 피할 수 있으나 밤에는 못 피합니다.
태어날때는 순서가 있으나 죽을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죽음은 장소가 따로 없습니다.
죽음의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날 언제올지 모르니 지혜롭게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왜, 무엇을 준비하라는 것입니까?
그 다음 단락이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인이 먼 길 가며 종에게 5,2,1 달란트를 맡기고 갔습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치 임금입니다.
1달란트는 6천일 품삭이니 20년치 임금입니다.
주인이 먼길 갔다 오니 5달란트 받은 종이 5달란트를 남겼습니다.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며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이 칭찬하고 상을 줍니다.
2달란트 받은 사람도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 사람도 동일하게 5달란트 남긴 사람과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칭찬합니다.
차별없이 절대평가를 하십니다.
능력이 커서 큰 일하고, 나는 작으니 작은 일할 수 있으나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 평가는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능력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감추어 고이 보관해 놓았습니다.
‘그에게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라트 가진 자에게 주라’(28)
달란트 비유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입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셈하심과 상주심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반드시 셈하심으로 심판하시고 상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수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평등이라는 단어는 안 나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앞에서 같다는 것에서는 평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평등하지 않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목에 참수형 당하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과
선데이 크리스찬이 하나님나라에서 똑같이 대우 받는다면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높여 주셔야
그분이 공평한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상주시는 하나님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의 잘 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속화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슬기로운 자로 하나님의 상 주심을 준비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장 마지막 단락이 보여줍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 하나님도 의인과 악인을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앉은 의인들에게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시고,
너희는 내가 주리고 목말랐을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때에 너희들이 먹이고 마시우며
입히고 돌보고 와서 보아주었다 하셨습니다(34-36).
의인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난 한번도 옷을 나눠준 적도 없고 물을 준 적도 없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41절, 악인들에게 말씀는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45,46절,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상주심을 예비하며 산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자 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 갈릴리 빈민출신, 옷도 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제자들에게 지극지 작은자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나를 위해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 나보다 못한 사람 배려하는 것이
마지막을 예비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옷 나눠주는 것이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보듯 주님 요구는 큰 것이 아닙니다.
부도 난자에게 그 빚 갚아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손 잡아주고, 울어주고 웃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죽음이 비수같이 다가와도
죽음을 슬기롭게 맞이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기도제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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