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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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금)생명의 위협 앞에서 신앙인의 바른 선택(단3 : 1~12)

  • seanho
  • 2020-11-20
  • 359 회
  • 3 건

2020.11.20 ()

 

생명의 위협 앞에서 신앙인의 바른 선택

다니엘 3 : 1~12

      

왕이 세운 금신상 3:1~7

 

1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7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신앙의 도전 3:8~12

 

8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9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10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11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본문해설

 

왕이 세운 금신상 3:1~7

 

권력은 항상 우상화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웁니다.

칠십인역 성경에서는 이 일이 그의 통치 18년에 일어났다고 소개합니다.

한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던 그가 금신상을 세우는 어리석은 일을 합니다.

그가 세운 금신상은 그의 꿈이 생각나게 합니다(2:32).

또한 왕권에 대한 자만심이나 자신의 통치를 기념하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일은 자신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느부갓네살왕은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는 사람은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지는 형벌에 처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과 권세에 취해 모든 권세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습성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

느부갓네살왕이 금신상을 세워 그 앞에 절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협하는 우상은 무엇인가요?

 

 

신앙의 도전 3:8~12

 

세상에서 신앙인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금신상으로 인해 다니엘의 세 친구는 다시 신앙의 도전을 받습니다.

갈대아(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의 형통을 시기해 세 친구를 참소합니다.

신상이 두라 평지에 놓였기에 왕궁에 있는 다니엘보다 지방 관료였던 세 친구가 더 큰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 친구는 다시 한번 왕의 명령과 하나님의 계명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1:8~16).

신앙이란 하나님을 절대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매 순간 이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아름다운 신앙의 꽃은 바른 선택 속에서 피어납니다.

-

갈대아 사람들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참소하면서 제시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내가 선택할 일은 무엇인가요?

    • seanho 20-11-20
      묵상

      오늘 말씀을 보면서, 특별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의 명을 어기고,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당시 다니엘의 세 친구가 처한 상황은 당시의 시대에서 모두가 '불가피하다.' '어쩔수 없지.'라고 말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금 신상에 절해도 어쩌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기 보다는 이해하며 말을 아낄만한 상황임에도 그들은 거부했다.
      그 셋에게 그 순간은 타인에 눈에 자신과 자신의 신앙이 어떻게 비춰질지에 대해서 두려운 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중심이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 순간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지금 불가피한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 나의 믿음과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 내고 있을까?
      ..
      또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해 보면, 10절 멀씀을 보면서 당시 금 신상에서 절하라는 명령과 상황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화려한 축제의 장,
      모두가 그 상황을 기뻐하고 즐기는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축제로 모두가  즐거워하고, 이방인들로서는 가볍게 여기고, 문화로 받아들여 타협하는 유다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적인 싸움이고, 또한 믿음을 증명해 내야하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순간들이 너무 많다. 축제로, 문화로 둔갑해서 우리의 신앙을 교묘하게 타협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간괴가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우리는 얼마나 민감하게 영적으로 대적하고 있을까?
    • 야긴과보아스 20-11-2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단3;1)

      주어가 주께서나 나로 바뀌면 생기는 일을 보게 된다.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 통치후 꽤 시간이 지난후의 일을 소개한다.
      자신감 붙고, 중 근동 전체를 통치하는 제국을 건설하고 났으니
      자긍심도 있었고, 자만심도 생겼을 것이다.
      그때 느누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높이 30미터
      아파트 10층 정도 높이의 신상을 만든다.
      신상을 만드는 일은 당시는 드문일은 아니었다.
      애굽에서도 왕의 형상을 동상으로 만들기도 하였고,
      수메르, 앗스르, 바벨론에서는 주로 사람보다는 신상을 만들었다.
      그래도 크기는 5미터 내외로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신상을 만들었다.

      한때 다니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신뢰하여 다니엘을 총리로 세웠다.
      나라가 지금까지 태평성대한 것은 어쩌면 다니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편안함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누구든지 타락하기 쉽다.
      그에게 높은 신앙의 기준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어느 순간 그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사라지고 자신이 주인이 되었다.
      그 결과가 두라 평지의 신상이다.

      이러한 신앙은 언제나 나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내 삶속에서 평안함이 지속되는 것이 은혜로만 가지는 않는다.
      그럴때 생기기 쉬운 일이 주어가 바뀌는 일이다.
      내 삶속에서 주어가 주께서에서 나로 바뀌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매순간 인정하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출발이 하나님이 될 때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주어가 되어 하나님을 장식물처럼 여기면
      하나님도 십자가도 우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든 까닭이다.
      하나님 대신 내가 라는 주어라는 사실을 고정하고
      하나님조차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절하고
      하나님대신 하나님 손에 들려진 것들을 탐했으니 우상이다.

      교회를 다녀도 예배를 드려도 나 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신앙이 길이 아닌 우상의 길 걷는 것이겠구나.
      주어가 바뀌는 길은 내가 죽어야 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 날마다 성령이 인도하셔야
      신앙의 길 갈 수 있다.

      가만히 보면 내가 만난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
      남의 상황고 사건도 내 경험의 눈으로 재단하게 된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을까?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진 사람인가 돌아보아야 한다.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조금의 성취을 가지고도 죄악의 본성들이 들어난다.

      나의 신앙길에서 내가 왕 노릇하지 않는 것,
      내가 반드시 내려오는 것이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 자리에 하나님을 초청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을 줄 아는 것만큼
      그보다 더 큰 신앙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 Coramdeo 20-11-21
      이방 왕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참으로 모든신들의 신이며 모든 왕의 주재시라고 고백했었던 느부갓네살왕
      이제는 나라가 강성해지자 금신상을 만들어 모든사람에게 절하도록 하며 자신을 우상화 하고 신격화한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딜레마인가?
      나를 비롯하여 종종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환경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바뀌는것을 볼수있다
      불과 몇년전만해도 나는 주님께 고백을 드렸었다
      저는 이스라엘백성들 처럼 주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그러한 자가 되지 않겠다고 ..
      이러한 고백을 드렸을당시에는 정말 은혜를 망각하지 않을거라는 확신까지 들었었다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그러한 생각들이  교만이었고 인간의 본성을 순간 잊어버림에서 온 고백이 아니었나싶다
      문제가 있을떄는 주님께 겸손히 나아가게되고 또 문제가 해결되면 슬그머니 주님께 곁을 두고
      이러한 삶을 반복하여 살게되면 절대 나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 할것이다
      또한 매순간순간마다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는 삶가운데서 번번히 주님의 뜻대로가 아닌 내가 좋은데로를 택하며 살게 될것이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해버리는 영적 한센병에 걸릴까 두렵다
      큐티를 하면서 엎드리다보면 내 안에 주님을 더 깊히 알고자 하며 주님께 더 친근하게 가고싶어하는 갈망이 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답답함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동안 너무 나태해져서 영적 칼이 무디어져서 그렇지 않을까?  내가  여전히 세상에서의 삶을 중요시하며  염려하고 있어서일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신다 해도 이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답답함과 갈망을 해소하기위해서 주님께 나아가는것이다
      엎드리고 있는 상태에서도 온갖 생각들이 나를 어지럽혀서 주님께 집중이 안될 때가 종종있다
      어떤날은 엎드려서 한숨만 쉬고 있을떄도 있다
      이러한 증상들은 매일매일 영적훈련을 하지 않아서 그런듯 싶다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그나마 감사한것이 내 안에 이러한 갈등과 갈망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