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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묵상: 12.6(토)·베데스다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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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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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3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본문 해설
베데스다 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 가운데에는 38년 동안 병으로 누워 살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일어설 힘도 없었고, 그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가 붙들고 있던 희망이라고는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소문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의 현실을 바꾸지 못했고,
그의 삶은 점점 더 깊은 절망과 무기력 속에 갇혀 있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나 38년된 병자에는 상관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먼저 다가오신다. 그리고 뜻밖의 질문을 던지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치료 의사가 아니라, 오래된 절망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초대였다.
하지만 병자의 대답은 희망의 표현이 아니라 환경 탓과 자신의 무능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물이 움직여야 한다”,
“누군가 나를 넣어줘야 한다”는
옛 방식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조건과 제한을 뛰어넘어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한마디는 38년 동안 굳어 있던 그의 몸을 즉시 일으켜 세웠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장면은 우리의 믿음이나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복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베데스다 병자는 단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 자리 잡은 절망, 포기, 상처, 습관화된 무기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그 모든 시간보다 더 크신 분이시며,
우리가 눕고 있던 자리를 들고 새로운 걸음을 옮기게 하시는 분이시다.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묻고 계신다.
“네가 새롭게 되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그 모든 시간보다 크신 분이시며,
우리의 자리를 들고 새로운 걸음을 걷게 하시는 분이시다.
“베데스다(Bethesda)”는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그곳에서는 참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치유받는다는 전통은 사람들 사이의
경쟁·좌절·낙심만 키웠을 뿐, 누구도 온전한 구원을 누리게 하지 못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은혜의 집’에 들어오셔서
참된 자비와 은혜가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이름을 가졌으나 능력은 없었다.
은혜의 장소처럼 보였으나 사람의 기대와 전통만 가득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자 비로소 진짜 자비의 집이 되었다. 결
국 은혜는 장소나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자체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역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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