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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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묵상: 12.18(목) 막달라 마리아, 요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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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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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본문 해설

 

상처난 과거를 딛고 부활이 첫 증인이 된 여인

 

오늘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한 단어로 규정해 버리는 시대를 살아간다.

문제아, 실패자, 상처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빠르게 붙지만, 그 사람의 삶이 다시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성경 속 막달라 마리아 역시 그런 시선을 받아온 인물이다. 복음서는 그녀의 과거를 미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거가 그녀의 마지막 정체성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복음서가 그녀의 삶에 남긴 마지막 기록은 분명하다. 

그녀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아직 어두울 때” — 슬픔이 끝나기 전에도 사랑은 움직인다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향한 시간을 “아직 어두울 때”라고 기록한다. 

밤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시간, 슬픔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점이다. 

그녀는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향한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상황이 바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랑하는 이를 향한 책임과 애도의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 

무덤 앞에서 그녀가 던진 질문, “주님을 어디에 모셨습니까?”는 믿음의 선언이기보다 상실의 언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 슬픔이 끝나지 않은 그 시간에 부활의 새벽을 준비하고 계셨다. 

부활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사랑이 포기되지 않은 자리에서 먼저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이 장면은 보여 준다.

 

“왜 울고 있느냐?” —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용기 

무덤 앞에서 마리아에게 던져진 질문은 두 번 반복된다. 천사도, 예수도 같은 질문을 한다. 

“왜 울고 있느냐?” 

이 질문은 그녀를 책망하지 않는다. 울음을 멈추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질문이다. 회복은 종종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왜 이렇게 아픈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애도하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유의 문이 열린다. 

성경은 울음을 믿음의 실패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예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한다. 

울음은 사랑이 진짜였다는 증거이며, 마음이 아직 굳어지지 않았다는 신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척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실하게 아파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마리아!” —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세계가 다시 초점 맞춰진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는 그를 정원지기로 착각한다. 

그러나 단 한 단어,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마리아!” 그 호명은 설명도 논증도 아니다. 관계의 언어이며, 기억의 언어이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는 다시 초점을 찾고, 그녀는 “라뵈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과거의 라벨로 부르지 않으신다. 상처의 목록이나 실패의 기록으로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부르신다. 

그 부르심 속에서 사람은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를 회복한다. 

회복은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정체성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나를 붙잡지 말고… 가서 말하라” — 눈물에서 사명으로 

예수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잡지 말고 가서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과거의 방식으로 머무르지 말고,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명의 대상이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증언은 신뢰받지 못했지만, 예수는 가장 먼저 그녀를 증인으로 세우신다. 

복음은 언제나 낮게 평가되던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전해져 왔다. 

하나님은 여전히 지워진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치유는 개인적인 위로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를 향한 파송으로 이어진다.

 

“부활은 눈물이 마른 뒤에 오는 게 아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부활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부활은 완벽하게 정리된 인생의 끝에서 찾아오지 않는다. 

부활은 눈물 한가운데, 상처를 안고 새벽으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온다. 

그녀는 상처가 끝난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들고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새벽에 이름으로 불림을 받았고, 첫 증인이 되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어두운 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라벨이 아니라 이름으로, 수치가 아니라 사명으로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작게라도 응답하는 모든 삶 위에, 부활의 새벽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밝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