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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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헤렘; 진멸하라(신7;12-26)
- 느헤미야강
- 2020-04-20
- 448 회
- 2 건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배되는 성품인데 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본문설명]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16절)
이 구절은 이스라엘보다 수가 많고 강한 가나안 일곱 족속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전투수칙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진멸하라’ 이 말씀이 히브리어로 ‘헤렘’ 입니다.
‘헤렘’은 사물이나 사람을 전적으로 여호와께 바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헤렘’은 인간이 만질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습니다.
만약 만지거나 가지면 신성 모독이 되는 것이지요.
“가증히 여기시는 것"(25절)이란 표현은
바로 ‘헤렘’으로 구별되어진 것을 만지거나,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수로라도 만지거나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는 것’(16절)이요,
여호수아서에서도 이것을 "완전한 파괴"인 "진멸"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다.
아예 만지거나, 소유할 수 없게 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그동안 이 말씀을 도덕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니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 접근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접근해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소유와 관련된
종교적인 영역이기에 이스라엘에는 합법적인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진멸하라는 말씀을 윤리, 도적으로가 아니라 종교적 영역, 하나님 신앙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 이유를 9장에서 선명하게 해설합니다.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죄로 물든 일곱 족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지요.
실상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그 땅의 원주민이 아니라
그들 역시 무력으로 토착민들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차고 넘치는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다산의 신들을 섬겼으며, 풍요의 미명아래 합법적으로 매음을 즐겼던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땅으로 점찍은
가나안땅을 악함으로 물들인 족속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땅, 그 땅을 악하게 만든 그들,
하나님이 마음에 두셨기에 하나님께 드려진 곳,
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대상으로 드려진 이들,
그래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면에서,
가나안 족속은 심판의 대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헤렘’인 것입니다.
그들은 대표적인 다산의 신인 ‘아세라’신은
바알을 포함한 70명의 신을 낳은 여신으로 성문란과 전쟁의 신입니다.
이것은 필히 이스라엘의 올무가 될 수 있기에 탐내지도 말고, 불살라 버리라고 하신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것들을 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에 헤렘이 명령되었던 것입니다.
헤렘의 원칙은 진멸하는 것이 있으나,
최소한 많이 양보해서 그것으로부터 어떤 이익도 취할 수 없게 만드는 것에 있에 있습니다.
죽일 수 없다면 그것의 최선은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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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강 20-04-21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가장 약해서이다.
가장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강한 손으로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길이었다.
그런데 우상숭배의 함정이 만들어졌다.하나님은 이 백성들이 그 곳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들의 악한 도모를 잘 아는지라,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
하나님나라의 롤모델을 삼기 위하여 ‘헤렘’을 명령하셨다.
택함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이 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세상 모든 것의 주권은 오직 여호와께 있다.
피조물이 전능자의 선택을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눈은 근시안이다.
넓은 우주를 보시다가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볼 때는 그 사람 밖에 안 보시기 때문이다.
운동회나 학예회 그리고 입학식때나 졸업식 때 부모의 눈과 같다.그 눈은 늘 고정되어 있다.
잠시 다른 곳을 보더라도 금시 돌아온다.내 자녀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똑 같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자녀들만 보는 아버지 하나님시다.
자녀가 할 일은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할 뿐이다.
뛰다가 넘어져도 좋고, 뒤쳐져도 괜찮다.어려움이 와도 좋고, 고난이 닥쳐도 괜찮다.
아버지의 눈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눈을 의식하고 사는 자가 신앙인이다.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약하지 않다.
외롭지 않다.
불꽃 같은 눈과 강한 손을 가지신 분이 나의 하나님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
- 야긴과보아스 20-04-21
- 조금씩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7;22)
1.
왜 하나님은 한꺼번에 다 쓸어버리지 않고 ‘조금씩’ 급하지 않게 하라 하실까?
내 마음에는 기회가 왔을 때 ‘한꺼번에’가 더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조금씩이라 히신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하신다.
2.
어찌보면 신앙생활의 조급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듯 하다.
눈 앞의 여러 상황들을 놓고
그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지지부진한 것처럼 보이는 여정이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믿음에 대한 유혹에
늘 기웃거리기 쉬운 속성을 가진 인간에게 조금씩이라 하신다.
‘한꺼번에’를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은
하나님의 ‘조금씩 약속’엔 기다리기 지루해해서
‘한꺼번에 세상’을 선택하기를 좋아한다.
3.
나 또한 그랬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구원하긴 한 것이 맞아?
그러면 왜 내가 이렇게 초라하고 약하지?
지지부진하지?
정말 이 길 갈 수 있을까?
성령님이 내 속에 살아 계시기라도 한 것이 맞아?
온갖 잡생각과 회의는 청소년 시설을 거쳐 오랫동안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내내 괴롭혔다.
그 이유는 ‘한꺼번에 세상’을 택하면 절대 보이지 않는
‘조금씩 약속’이 주는 지루함 때문이었다.
4
코로나 19로 세상이 괴로워하고 교회서 드리는 예배는 일시정지.
재택근무, 아이들의 학교수업 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각자의 성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조금씩’ 세워가시는 것을 본다.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따라야 할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삶은 점진적인 삶임을 알게 하신다.
왜 한방에 훅 가는 은혜로 모두를 부르시지 않으셨는지
왜 삼년이라는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하며 조금씩 변화시키셨는지 알 것 같다.
하나님은 늘 역설적이시다.
죄로 가득한 나를 예수 십자가로 깨끗하다 하신다.
한꺼번에 뭔가를 하고 얻고 싶은 내게 조금씩 더 충분한 은혜를 더하신다.
십자가에서 매 초마다 고통을 더하시며
조금씩 나를 향한 사랑을 전해주고 싶었던 주님의 은혜,
그래서 종종 못으로 된 십자가에 날마다 내 손가락을 찔러본다.
아프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5
지금 모압 평지에 있는 출애굽 2세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순수한 성경묵상이 아니라 고고학에서 발견한 은혜를 대입하여
하나님께서 왜 조금씩 정복하라고 하신지를 깨달았다.
성서고고학과 고대근동의 역사를 추적하다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을때에 당시 애굽은 고대근동의 최강국이다.
그 세력은 애굽 주위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전역까지 힘이 미치던때이다.
그래서 애스라엘이 출애굽하자마자 바로 가나안땅으로 들어간다면
정복은 불가능하고 이스라엘이 오히려 애굽의 막강한 힘에 진멸당할 수 있었다.
6
40년 광야생활,
1차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믿음없음으로 인한 자처한 일이었다해도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을 가장 확실하고 선명하게 이용하시는 분이셨다.
애굽의 힘이 가나안에 미치는 것이 점점 약해지는 역사를 이용하셨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사를 활용하신 것이다.
그때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때와 맞아 떨어지는 시기였다.
그들의 힘이 약해지는때에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시험하고 준비시키면서 가나안 정복의 때를 기다리셨다.
그러니 ‘조금씩’은 애굽의 영향이 점점 미약해지는 때이자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없음을 준비시키며 훈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애굽의 힘이 쇠약해지는 때를 기다림이며
가나안 족속들의 악함이 극에 달하여 심판하심의 때를 맞춘 시간이다.
이 때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의 때가 일치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란 내편에서는 ‘조금씩’인데
하나님의 편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으신 ‘조금씩’이다.
7
홍해를 건널때의 밤새도록 일하심과 너무도 닮아 있다.
야곱을 만들어가시는 것과도 너무 흡사하다.
나를 만들어가시는 것도 그렇다.
돌아보면 조금씩 주님이 인도하셨던 한 걸름 걸음마다
주님을 알도록 인도하신 걸음임을 이렇게 깨닫는다.
세상을, 상황을, 문제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는 건(18),
그 걸음마다 주님이 함께하셨음을 기억하는 것 밖에 없음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이 주님이 일하시는 때임을,
코로나19로 멈춰버린 세상같은 오늘,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는다.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신7;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