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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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수) '왕'이라 쓰고도... (요19:17-27)
- seanho
- 2020-03-11
- 382 회
- 1 건
요한복음19:17-27
'왕'이라 쓰고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빌라도는 "유다 사람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명패를 써 붙였다. (19절)
사람들은 '자칭'이라는 말을 붙이자고 하였지만.
빌라도는 쓸것을 쓴것 이라며 그대로 명패를 달아두었다.
(23-24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에 예수님의 겉 옷을 찢어나눠 갖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서 갖기로 한다.
이 장면은 명패에 쓰여진 호칭과 그 앞에서
이루어 지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왕이라 쓰여 있지만 그 앞에서는 그 왕의 겉옷 따위를
나눠 갖고 속옷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는 이 모습...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전혀 낯설지 않은것 같다.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삶은 그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가?
그분의 명패에는 왕이라고 쓰여있지만
그 앞에 군인들은 그분을 전혀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많은 순간 실제로 그분을 내 삶에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는가?
왕 앞에 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낡은 옷 따위가 아닐텐데,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 분의 수준에 걸맞는 것들을 구하였는가? 생각해본다.
왕이라 쓰고도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군사들은
때로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본다.
'왕'이라 쓰고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빌라도는 "유다 사람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명패를 써 붙였다. (19절)
사람들은 '자칭'이라는 말을 붙이자고 하였지만.
빌라도는 쓸것을 쓴것 이라며 그대로 명패를 달아두었다.
(23-24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에 예수님의 겉 옷을 찢어나눠 갖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서 갖기로 한다.
이 장면은 명패에 쓰여진 호칭과 그 앞에서
이루어 지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왕이라 쓰여 있지만 그 앞에서는 그 왕의 겉옷 따위를
나눠 갖고 속옷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는 이 모습...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전혀 낯설지 않은것 같다.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삶은 그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가?
그분의 명패에는 왕이라고 쓰여있지만
그 앞에 군인들은 그분을 전혀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내 삶에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많은 순간 실제로 그분을 내 삶에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는가?
왕 앞에 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낡은 옷 따위가 아닐텐데,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 분의 수준에 걸맞는 것들을 구하였는가? 생각해본다.
왕이라 쓰고도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군사들은
때로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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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5 말씀묵상
순서를 먼저 바꾸면 <요19;17-27>
유대인의 왕이라(19절)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20절)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면
로마의 가이사에 황제에 대한 반란이나 죄가 되기에
그렇게 쓰여지기를 바랬다.
그래야 자신들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 죽은 정치적 희생양이 되니까 말이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협박에 사형을 언도할 밖에 없었으나
더 이상 굴복할 의도는 없어 보인다.
단지, 유대인의 왕 차원이 아니라
세가지 언어로 기록했다.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이다.
빌라도가 이렇게 부착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역사이다.
예수님 좌우에 두 강도가 매달려 있었고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 팻말이 없었더라면
다른 두 강도와 같은 패거리정도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팻말은 세 개의 언어로 표시됨으로써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만인의 구주이심을
빌라도를 통해서 공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팻말을 요구하신 적이 없으시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다.
왜 예수님께 이런 선물,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17절)
이 말씀이 놀랍게 다가온다.
‘지셨다’는 것은 능동형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로마군병들이 지워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간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스스로 져야 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신 것이다.
해골 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7절)
‘나가시니’ 역시 능동형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힘이 부쳐 도중에 넘어지시기도 하시고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기는 하셨으나
동물 끌려가듯 어쩔 수 없이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자신해서 죽음의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셨다는 말이다.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했기 때문에,
로마 군병들의 폭력에 의해
원치 않는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지신 것이 아니다.
그것만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알고 기꺼이 지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 하신 것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욕망을 구하나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먼저 구함으로서
한 순간 정상을 차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자기 욕망을 구한 결과이다.
예수님은 순서를 바꾸라 하신다.
먼저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라.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 말씀따라 살라고 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책임져 주신다 하신다.
내 욕심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바르게 따라갈 때
진정한 은총, 참된 복을 허락하신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하셨다.
오늘 나의 삶이 먼저가 무엇이어야 함을 일깨워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