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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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금) 믿음의 대가를 치르기위해

  • seanho
  • 2020-03-13
  • 372 회
  • 1 건
요한복음 19:38-42

38절.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사람은 열두 제자중 한 사람이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소개되는 그는 유대교회에 추방되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숨겨왔던 사람이다.
그랬던 요셉은 왜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이제는
숨기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밝히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결단을 한 것일까?
그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분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죄가 없으면서도 그분이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 지는 것을 보면서,
그 험한 길을, 고통을 감수해 내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의 대가를 지불 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그는 더 이상
믿음의 대가를 삶으로 지불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당당히 드러내고
예수님의 장례를 진행한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면서도,
제발 내 믿음의 대가를 세상적인 패널티를 갖게되는 것으로는
지불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유대교의 박해가 두려워서 당당히 드러내지 못했던 요셉과 같이...
예수님의 능력이나, 영광이나, 구원은 소망하고 바라지만,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장면 만큼은 내 삶에서 딱 지우고 싶은 마음이있다.
그러나 요셉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대가를 치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 처럼.
다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십자가의 예수를 온전히 바라봐야겠다.
    • 느헤미야강 20-03-14
      1
      한 부류의 제자들은 드러내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함께 거하며 3년 동안을 따라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그 시점부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과 동행할 때는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때로는 대단한 기적을 베풀기도 하고,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목도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기도 했다.
      동시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에는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그 순간부터 이들은 두려워서 숨어버렸거나,
      자신들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대한 실망으로 좌절하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주님과 생사를 같이하겠노라고 맹세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안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기까지 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그 순간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어쩌면 자기 부인이 완전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내게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는 장면이다.

      2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부류의 제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평탄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겨
      마음으로는, 그들의 내면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믿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밝히지 못했던
      제자들이 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의 모든 사역들과 가르침을 듣고, 보고, 체험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요 메시아임을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은 시간 안에 곧 메시아의 세계가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 펼쳐진 현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인정하는 순간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수 많은 불이익들을 당장 견뎌내기에는
      아직은 그 믿음의 용기가 부족했었을 것 아닐까?
      그리고 그는 속히 메시아의 세계가 펼쳐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을 것이며,
      심중에 있는 어떤 것들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을 듯 싶다.
      그런데 그렇게 메시아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자신이 메시아로 믿었던 그 예수가
      결국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았을 때 그에게 찾아온 절망은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싶다.
      그리고 그에게 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을 터.
      그런 중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생전에 다하지 못했던 그의 믿음의 고백을
      그의 주검을 매장하면서 고백하지는 않았을까? 여겨진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렇게 혹은 행동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지 싶다.

      처음부터 주님을 따랐으나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그 순간에
      주님 곁을 떠나버린 제자들과,
      처음엔 심중엔 믿음이 있었으나 겉으로 그 믿음의 고백을 하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조용히 그 앞에 나아온 제자들,
      두 부류의 제자들이 보인다.

      모두에게서 인간의 나약함을 본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몸짓을 본다.
      이렇게 인간은 온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
      온전히 주님께만 의가 있고,
      생명이 있음을 의탁하지 못할 때 아무 효과도 없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몸부림을 치고 만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자기부인에 대해, 자기부인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구하고 또 구한다.
      날마다의 일상에서 오직 주님의 전적인 주권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뜻과 의만이 드러나기를 기도하며 구하고 살기를 원한다.
      작은 일에 자기 부인이 가능하다면 결정적인 어떤 순간에도
      오직 주님만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매사에 작은 일들에서 나를 죽이고 참고 인내하는 법을 시행해보아야지.

      은혜가 되고 그래도 내게 소망을 주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낸 두 부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신 임하심을 입은 이후에는 온전하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렇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전적인 능력과 온전한 능력은
      오직 성령님께 달려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늘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으로
      날마다 나를 변화시켜주실 것을 구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나도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주님을 닮아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참된 제자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제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