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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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수) 요한18장_성도의 영광

  • 느헤미야강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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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8_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이 성도의 힘이다

 

요한복음 18장과 19장에 나오는 주님의 수난 기사는

절대적으로 주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가장 좋은 장소를 알고 기기로 가십니다(1~2).

주님은 당하실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4).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주님은 주도적으로누구를 찾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내가 그로라’ 말씀하실때 그들은 뒤로 넘어집니다(5).

주님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모세를 호렙산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포하실 때

바로 그 이름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가 양떼를 보호하듯 제자들을 보호하시는데,

이는 제자들이 아직 순교할 때가 아니며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들에게는 아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성경을 기록해야 하는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인간적인 만용으로밖에는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반응입니다(10~11).

 

성령으로가 아니면 우리는 인간의 열심 즉 육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육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그렇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에 따라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그 밤에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흩어졌으나

베드로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는 요한일 것이다)

안나스의 집뜰까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17~18, 25~27).

성령이 아닌 인간의 용기와 열심은 가상하나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날이 목요일 밤이었고

이제 유월절이 시작하는 안식일 저녁 전에

모든 처형을 끝내야했기 때문에 공회의 지도자들은 조급했습니다.

새벽에 주님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셨고

이른 아침에는 빌라도의 관정으로 주님을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는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에

주님께서 친히 왕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36~37).

빌라도는 유월절 사면의 관습을 따라서 주님을 놓아주려고 하지만,

결국은 백성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기로 결정합니다(39~40).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왕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잡히시고 모욕을 당하시며, 재판을 받으시는

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성경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독자에게 왜 이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당해야 하는 영원한 운명을 주님이 대신 홀로 감당하시되,

조금도 경감되지 않은 죄의 대가와 삯을 감당하십니다.

이는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주님은 말씀대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묘사한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묵상하고 그 겸손 속에 나타나는 영광,

그 받으신 굴욕과 수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그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견디지 못할 고난과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언제나 복되신 주님의 영광을 묵상함이

모든 성도의 유일한 능력이고 힘이고 기쁨이고 소망입니다.

    • 김성민목사 19-04-11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18:27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언 장담 했었다. 여기 있은 사람들이 다 얘수님을 버려도 나는 절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아니 몰래 숨어서 예수님을 뒤 쫓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해 도망하였다. 그제서야 베드로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 괴로워 했다.

      닭이 세번 울어야만 우리는 자신의 죄를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저주하고 외면하는 것을 모른채 죄 가운대로 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벽닭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 내가 죄의 길로 빠져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시 예수님 곁으로 돌아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회개하고 다시 사도사 될 수 있었다. 말씀은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한다. 오늘도 말씀으로 역사하실 하나님께서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란다.
    • 이형원전도사 19-04-12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18:27)"

      오늘 말씀 가운데 역시 나에게 다가오는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다.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그렇게 장담했다.
      하지만 자신에 신변에 위험이 생겼을 때 그토록 장담하며 이야기 했던 자신의 다짐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달라지게 된다.
      그는 그 어떠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타협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다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힘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것은 곧 그 일을 내가 하는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게 될 때 베드로 처럼 자기 자신을 과신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성령님을 구하게 될 때
      베드로처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러한 믿음이 온전하여 지게 되길 원한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고백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