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3.18(월) 눅22장_사단이 들어가니
- 느헤미야강
- 2019-03-18
- 470 회
- 2 건
1.
눅22장은 유다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그의 기대가 깨어짐으로써 배신을 했다고 하고,
혹은 그가 돈을 사랑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요12:6).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돈을 사랑해서였든, 혁명을 기대했든
성경은 그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분명한 원인을 밝힙니다(3).
사도 베드로는 사단을 대적하라고 했고(벧전5:8)
사단을 대적하면 사단이 도망한다고 야고보 사도는 가르쳤습니다(약4:7).
결국 유다는 그의 욕심 혹은 불만으로 인하여 사단을 물리치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저주스런 일입니다.
사단이 들어갈 수 있는 틈 2가지가 있습니다.
욕심과 불만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내 안에 욕심과 불만을 살피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2,
유월절 식사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자리를 마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압제에서의 어린양의 피로 인한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것이므로(고전5:7)
유월절은 주님이 제정하시는 성만찬에 정신이 담겨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지키는
새 언약의 규례가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넘겨줄 유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1~22).
이 와중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크냐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24).
추측건대 누가 예수님의 옆에 앉을 것인가 하는 자리 배치 때문에
이 논쟁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세상 기준과 반대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들 중에 섬기는 자로 계셨습니다(27).
하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섬김이나 대접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모든 어려움 중에
함께 해왔다는 것을 격려하십니다(28).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그 나라를 맡기셨듯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겠다고 하십니다(29).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듯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말씀하심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그 길에서 섬김의 길을 가려면
수많은 위기와 환란과 고통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감당하게 될 때에
주님과 같이 하나님나라 보좌에 앉고 먹게되며
이스라엘 지파를 다스리는 은혜가 있을거라 하십니다.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말씀이 32절입니다.
사단이 벌써 베드로를 넘어뜨리려고 하였지만,
주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하시고고
넘어졌다가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잡아주라고 말씀하십니다(32).
이 말이 베드로에게는 거슬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감을 피력하지만,
주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할때에
예수님의 눈과 맞추셨고 그는 통곡하였다고 하는 구절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눈이 마주치고 베드로가 통곡하였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역시 유다일 수 있고 베드로 일 수 있으나
내 삶의 나락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을 참되게 기억하면
다시 일어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습관대로 감란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39).
예수님의 기도는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44).’
예수님께서 이 기도에서 너무나 영육간에 소진하셨기 때문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기도를 도왔습니다(43).
이에 반해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하시고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으나
제자들은 기도할 시간에 잠들어 있음으로 넘어졌습니다.
4.
본문을 통해 주목하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의지에 반하여 억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불만이나 실망, 분노 그 어떤 감정과 상태를 통해서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감정이나 이성의 판단 그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처럼 부패해서 속이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렘17:9).
성도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나라의 기준은 세상과 전혀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공과 높음에 대한
세상의 가치 기준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시 주어 담고 있다면 그것은 은혜에 역행하는 삶이고
심히 위험한 삶입니다.
정답을 알아도 베드로가 넘어졌듯이, 우리도 다 넘어집니다.
하지만, 돌이킨 후에는 그 실수와 잘못 마저도
하나님께서 형제를 세우는 일에 쓰시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배웁니다.
자들을 위한 은혜가 놀랍습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
주님이 주고자 하시는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난
그 어떤 잘못되고 합당치 않은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위험한 길입니다.
넘어져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십니다.
넘어졌을 때, 자신을 향한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패한 자를 위한 은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전글 3.19(화) 눅23장_예수님에 대한 판단 19.03.19
- 다음글 3.16(토) 눅21장_정신바짝 차려 기도해야 합니다 19.03.16
-
- 김성민목사 19-03-19
-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22:46
나는 잠 들어 있는가?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나오는 것이 참 어렵다. 몸이 아프고 피곤한 날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들어 버리면 안되기에 어떻게 해서든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새벽에 교회로 나가 기도한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든다. 단지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한다고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말은 다른 날로 나의 영혼육이 깨어 있어애 한다는 말이 된다.
육신도 깨어야 하디만 영과 혼도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면 시험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된다.
내 집에 도둑과 강도가 든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깨어 있으면 대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잠들어 있으면 꼼작없이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험에 들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영혼육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너무 간단하다.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된다. 나의 입술은 입 버릇처럼 예수님을 부르고, 나의 영과 혼은 예수님과 늘 교통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 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비록 나의 육신이 피곤해 잠들지라고 나의 영혼은 예수님께서 늘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함께하심을 나는 믿는다. 그러니 오늘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
- 이형원전도사 19-03-20
-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눅22:60)"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별히 이 장면은
고등학교 때 성극을 하면서 베드로 역할을 맡은 바가 있기에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 했지만 예수님을 시인할 때 닥칠 어려움을
대하는 상황에서는 그를 외면하고 말았던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싸움을 싸우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때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기를 강요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노라 고백하지만 그 믿음을 보여야할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갈 때도 많이 있다.
입으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지만 삶의 모습으로 그 분의 말씀을 부인하는
삶을 얼마나 살아가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된다.
입술의 고백과 삶의 모습이 모두 주님을 시인하는 모습이 되길 원한다.
그러한 삶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