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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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월) 마가8장_제자;자기부인,자기십자가를 지는 사람

  • 느헤미야강
  •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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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6: 칠병이어와 표적-눈을 떠라

예수님은 이방 지역인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사흘 동안”(2) 머무르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처음에는 각자 지니고 있던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금새 떨어졌고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하루만 굶어도 기진맥진 해졌습니다.

흩어 보내기에는 상태가 너무 안좋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상태를 보시고 마음 아파 하시자

제자들은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합니다(4).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남아 있는 빵 일곱 개를 받아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6) 하시고 물고기 몇 마리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자 또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작은 음식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8).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 나라가 이방인들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십니다.

달마누다가 어디였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유대인들이 살던 곳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곳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11)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볼 눈이 있다면 이미 그분을 통해 일어난 일만으로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기에 충분한데,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에 이런 요청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12) 그 요청을 거부하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의 완고함에 대해

예수님은 답답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벳세다 방향으로 향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빵을 준비해 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알아 보니 가지고 있는 빵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은 추종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파는 빵을 사 먹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했습니다(16).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무딘 마음(17)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했고,

그랬다면 빵 문제로 인해 근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은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믿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믿는다면 질병이나 장애나

먹고 마시는 문제로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그 나라를 위해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바리새파 사람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빵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이고 세속적인 경향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인데,

제자들이 빵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이나 깨닫지 못하느냐?”(17, 21)고 책망하십니다.

깨뜨리다다다르다는 말이 합쳐진 깨닫다는 말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무뎌진 마음과 무지와 불신을 깨뜨리고진리에 다다르는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기적들과 그분의 말씀들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서편에 있는 벳새다에 이릅니다(22).

그 때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실 수 있으면서도 예수님은 이번에도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그를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두 눈에 침을 밷고 그에게 손을 얻으십니다(23).

그에게도 사랑의 접촉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24)고 물으시니,

그 사람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고 대답합니다(25).

예수님은 그의 눈에 다시 손을 얻으십니다.

마음으로는 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떼니 그 사람이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뚫어지듯이”(25) 무엇인가를 응시합니다.

그러자 희미하게 보이던 것들이 선명해졌습니다(26).

 

이번 기적은 다른 기적들과 다릅니다.

다른 기적들은 전적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유하자면, 예수께서 따 놓으신 문을

그 사람이 밀어 여는 식이었습니다.

열쇠는 예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분이 먼저 문을 따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잠금 해제된 문을 밀어 여는 것은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그동안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그분을 통해 일어난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닫혀진 마음의 자물쇠를 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의 눈과 귀는 여전히 굳게 닫혀 있습니다.

다행히도 눈먼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눈과 귀가 살짝 열려서 불완전하지만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자물쇠를 열어 놓았으니 이제 밀어 열어라고 말하십니다.

눈먼 사람이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처럼

그들도 희미하게 보이는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27-38: 신앙고백과 수난예고 - 참 제자의 자리와 본질 - 나를 따르라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마무리 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의 가이사랴로 가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각기 들은 대로 전합니다.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도 하고, 예언자 가운데 하나가 왔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고 귀신 들렸다고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

이것이 예수님이 정작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변인이 되어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30)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마치 벳새다의 눈먼 사람이 희미하게 보는 것과 같이

아직은 불완전한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31)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도 않으셨고 모호하게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드러내 놓고”(32) 즉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아무 의혹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바짝 끌어 당기며 반발합니다.

항의하였다”(32)고 번역된 단어는 꾸중했다혹은 책망했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반발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33).

베드로만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향해 사탄아라고 말한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 사안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메시아로서 예수께서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려고 하는 셈입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뜻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배후에 속이는 자사탄이 움직이고 있음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34)은 곧 제자를 말합니다.

제자는 스승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은 leadership이 아니라 followership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followership의 두 요소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것입니다.

자신의 철학과 신념과 목적과 야망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가시려는 길은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과 같습니다. 스승이 하신 것처럼 제자도 해야 합니다.

스승이 사신 것처럼 제자도 살아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매우 도전적이고 무거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라는 것이고,

그들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들을 외면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손해 보는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목숨을 잃는 것”(35)과 같은 일입니다.

반대로, 세상적인 것에 목숨 걸고 사는 삶은

결국 생명을 잃는 결과에 이를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의미가 없고(36)

목숨을 주고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37).

목숨은 그토록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모태 안에 있는 생명이 귀하다면 태어난 이후의 생명은 더욱 귀합니다.

그렇다면 이생 이후에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더 더욱 귀합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목숨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아의 생명이 태어난 이후의 생명을 향해 가듯,

이 땅에서의 생명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향해 가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38).

물질이 전부이고 육신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때로 박해합니다.

그 불신이 음란하고 죄 많은”(38) 세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세대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제자들은 고개를 들 것이고

그들을 박해 하던 사람들은 고개를 떨굴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진리를 환히 보아야 합니다.

희미하게 보는 것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묵상:

지금 제자들은 진리를 희미하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은 알아 보았지만

그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이루고 싶었던 그들의 꿈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이제 곧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죽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그는 제자로 따라 나섰지만 실은 선생의 역할을 하려 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음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이 있음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메시아를 통해 이 땅에서의 염원을 성취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벳새다의 눈먼 사람이 희미하게 보는 것처럼 보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고 묵상하며 희미하게나마 진리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무지와 어둠의 문을 깨뜨려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깨뜨려 열린 문을 밀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분명히 보고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자랑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목숨을 위해 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힘쓰면 벳새다의 눈먼 사람처럼 마침내 환히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 김성민목사 19-02-12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막8:11-13
      유대인 무리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시험하고자 표적과 기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중심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떠나 가셨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다면 과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꼬투리 잡을 것을 찾아 비난하고 비판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믿는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찾아온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께 보여주기를, 들려주시기를, 만져지기를 원했고 그리해 주시면 내가 믿겠다고 졸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뜨겁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음의 기적이 내 삶속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 이형원전도사 19-02-13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막8:11)"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며 표적을 구하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표적은
      그 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에 대한 이유보다는
      그저 표적만을 구했다. 그리고 그 표적을 구하는 마음 이면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심지어 힐난하는 마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분이 보여주시는 기적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믿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일이다.
      그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표적이 있는 것이지 그분이 표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도 예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기 보다 내 삶 속에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을 기대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능력을 계속해서 보여주길 기대하고 바란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내 삶 속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계속해서 나를 위하여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