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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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눅11장_기도가 신앙을 드러낸다
- 느헤미야강
- 2019-03-05
- 429 회
- 2 건
1. 1-13절: 기도에 대한 가르침
주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다.
제자들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익숙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그때 제자들은 자기들도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주님께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듯이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위 ‘주기도문’을 만나게 됩니다.
주기도에서 주목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먼저 나온다는 것입니다(2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도가 기본적인 필요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3절).
정화되지 않은 욕망을 쏟아내는 우리의 기도와 다른 점입니다.
셋째는 우리 자신의 영적 필요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제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세적인 부와 성공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제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통치(나라)가 온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최우선순위인 기도였습니다(2).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까?
나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가?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가?
그 후에 주님은 우리의 일상적 필요와 영적 필요를 구하라고 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비유(5-8절)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친구는 친구라고 부를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친구가 간청하는데 일어나는 것이 귀찮아서
청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청을 하면
결국 일어나 청을 들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가장 못된 인간과 가장 선하신 하나님을 대조시킵니다.
이렇게 못된 인간도 계속 간청하면 들어 주는데,
가장 선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들어 주시겠느냐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못된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잘 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이 못된 친구처럼 귀찮을 정도로
간청해야 들어 주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뒤집어 놓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줄 것이다”(9절)라고 권하시면서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10절)라고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꺼이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삶 속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최고의 선물이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기도하고는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정작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구해야 하는지 알고 기도하십니까?
2. 14-36절: 마음의 눈을 떠라
주님께서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시자,
어떤 이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14~15).
주님은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지 않으며,
설령 귀신이 쫓겨났다 해도 그 사람이 거듭나서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으면
귀신이 돌아와서 이전보다 더 황폐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앞에서 반응하지만, 회심이 일어나지 않다가 뒤로 돌아서면
그 사람의 영혼은 이전의 상태 보다 더 나빠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한 여인이 소리쳐 주님을 잉태하고
주님께 젖을 먹인 어머니를 찬양하는데,
주님은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으셨지만,
참으로 복있는 자는 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하셨습니다(27~28).
그리고 여전히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악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심판의 날에 회개한 이방인들이 오히려 회개치 않는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충격적 선언을 하셨습니다(31~32).
누가복음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서라는 점에서
이런 묘사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구원은 주님을 모시는 모든 이방인에게 열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갑자기 등불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눈이 어둡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33~36).
하나님은 빛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으나
소경들은 도무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빛 가운데로 오지 않는 것입니다.
3. 37-54절: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책망
주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함께 점심을 드시는데
주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정결의식으로서)
그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37).
주님은 일부러 이렇게 하셨을 텐데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늘 겉을 씻는 형식에 집중하는 바리새인의 삶의 태도를 비난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속 마음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식사 자리가 불편할 수 밖에 없을
심히 무서운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저주를 명하신 것인데, ‘화 있을진저’라는 반복적 말씀을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행하셨습니다(42~52).
바리새인이 주님으로부터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비록 율법이 명하지도 않은 세세한 영역에서
십일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겉모습이고 형식일 뿐,
율법의 정신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 마음으로부터 저버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42).
주님은 형식을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그 형식이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을 저주하시자, 함께 있던 한 율법사가
자기들까지 모욕을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항의하였습니다(45).
주님은 율법사까지도 저주하십니다.
과거에 선지자들을 죽인 책임과, 지식의 열쇠를 갖고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책임을 율법사들에게 돌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점심 자리를 박차고 나오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세게(맹렬히) 주님께 달라붙어서 따지면서
주님이 무슨 말의 실수를 하는지 지켰다고 합니다(53~54).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책망을 달게 받지 못합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반영합니다.
기도가 자기 자신의 일상적 필요와 문제들을 중심으로 가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느 종교에서도 가능한 기도입니다.
단지 대상만을 하나님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의 관심과 기대의 최우선순위가 되게 만드는 능력이고
그것은 가장 은밀한 행위인 그 사람의 기도에서 반영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문제는 바로 이 참된 신앙의 부재였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었습니다.
자기가 옳고, 자기의 의가 관심사였기에
그들은 자기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예수님에게 달려들어
비난할 거리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분명한 회심에 이르지 못한 채,
말씀에 반응하다가 주저앉아버리면 그 영적 상태는
그 이전의 어떤 상태 보다도 더 악화됩니다.
나의 기도는 참된 신앙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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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목사 19-03-06
-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눅11:34
나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루의 시간 중 가장 많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하여 그 사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몸이 많이 아파 자연속에 살면서 자연을 바라보니 건강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느 날엔가는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이 너무 재미 있어서 몇날 몇일을 게임에 몰두 한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길거리에 지나가는 자동차, 건물이 모두 게임과 같이 보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는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육신의 눈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마음의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나의 마음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다. 눈이 온전하면 그의 몸이 밝을 것이고 만일 나쁘면 몸도 어두워진다고 말씀하신다.
성하다는 것은 건강하고, 온전하고,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영혼육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삶이 밝아지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영혼육이 세상을 향하여 있을 때 나의 삶은 어두워진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육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온전한 눈으로 하나남만을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되기를 소망한다. -
- 이형원전도사 19-03-07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11:4)"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근거에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에 있다.
내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또한 같은 죄로 인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죄인 이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내용 중에 이러한 고백이 잘 나타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듯이 나의 죄 또한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다.
일 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처럼 너무 큰 용서를 받아 놓고 나에게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을 정죄하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결코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품게 되길 기도한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난하기 보다 그 사람을 사랑하길 원한다.
때로는 마땅히 비난 할 수 있는 상황이라도 또 마땅히 정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내 마음의 미움과 분노의 표출이 아닌 사랑이 먼저이길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