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나눔

하나가 되는 공동체 구원의 감격과 거듭난 기쁨을 나누는 교회,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삶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6.5(수) 십자가 복음, 지혜의 절정

  • 느헤미야강
  • 2019-06-05
  • 492 회
  • 2 건

고전 1_십자가 복음, 지혜의 절정

 

고린도는 바울 사도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 도시 가운데 고린도는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수 많은 이교들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가장 필요했던 곳이었습니다만,

또한 복음이 들어가기 가장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18:11).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바울 사도는 글로에 집 사람들 편에 전해진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직접 방문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기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먼저 바울은 당시의 편지 형식에 따라 자신을 소개하고

또한 누구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인지를 밝힙니다(1-2).

그런 다음 그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인사(“샬롬”)

그리스인들의 인사(“은혜”)를 결합하여 만든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3).

이어서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적습니다(4-9).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5)이 늘어난 것과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는”(7) 것을 칭찬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계속 자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8)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10).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바울에게 전한 바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가 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 등으로 나뉘어

서로 자신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갈라져 있었습니다(12).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 즉 베드로는 고린도교회를 다녀 갔던 전도자들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도를 따라 파당을 형성했고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가 제일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전해 듣고 바울 사도는 한 마음이 되어 하나로 뭉치라고 권합니다(10).

그는 자신은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어 자신의 추종자를 만드는 데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합니다(17).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17)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17)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합니다(18-25).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려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는 복음은

인간적으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합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그 어떤 이치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도,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 사람들도

모두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실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의 절정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인간적인 지혜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26-31).

세상적으로 지혜롭지 않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어리석은 자를 통해 지혜 있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묵상: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분량은 너무도 작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논리와 분석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겸손히 자신을 연 다음에 다시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먼저 믿는 것이고 믿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믿음으로써만 알 수 있는 대상이며,

믿고 난 후에 이해를 추구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넉넉한 품으로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똑똑해지는 것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습성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 그리고 형제 자매들 앞에서 겸손히 행하기를 다짐합니다

    • 김성민목사 19-06-05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7-28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일하신다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이 들 때가 너무도 많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길을 가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고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나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고린도교화 성도들은 서로 잘났다고 싸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에 너희가 온전하여 질 수 있었음을 꼬집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마음에 큰 찔림을 준 것은 아마도 부족하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우쭐함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면 됐지, 이만하면 됐지라는 마음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니 그 사실도 모른체 자만했던 내가 부끄럽다.

      다시한번 말씀앞에서 나의 미련함과, 나약함과, 천하고, 없음을 깨닫게 된다. 맞습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이 나의 진정한 고백이 되기를 원한다.
    • 이형원전도사 19-06-07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1:12)"

      고린도 교회에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분쟁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게된다.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은 아볼로에게, 어떤 사람은 베드로에게 속한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이야기 하면서 분열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분열도 하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

      사람끼리의 연합은 곧 깨어지고 한계를 드러낸다. 그 연합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온전한 연합이 되고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합이 될 수 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사람을 더 바라보고 의지하는가? 하나님을 먼저 바라 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하루하루 살아감으로 반목과 분쟁의 원인이 아니라 화합하는
      삶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