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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0(금) 용서는 셈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1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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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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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은 교회 공동체와 신자의 삶에 관한 매우 실제적인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12–14절)과 죄 지은 형제와의 화해(15–17절), 공동체의 권위와 회복(18–20절)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베드로는 궁금함을 품고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1)
이 질문은 단순한 숫자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율법의 전통은 세 번까지만 용서해도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번’은 베드로의 나름의 배려와 관용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
이 숫자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곧 용서는 '계산하거나 조건을 다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자비를 흘려보내는 반응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가해진 상처나 잘못을 기억하고 계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참았는지 알아?”,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야.”라는 말 속엔 한계를 긋는 용서, 다시 말해 조건부 용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을 뿌리째 흔듭니다. 예수님은 셈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용서란, 상대방의 죄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정해 용서하면, 우리는 결국 새로운 잘못이 생길 때마다 과거의 잘못까지 꺼내어 덧붙이게 됩니다.그렇게 우리는 '용서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참고 견뎠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는 진정한 용서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애썼지만, 여전히 타인의 잘못이 자신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자신이 얼마나 큰 죄에서 용서받았는지, 자신에게 부어진 자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가', '그 사람이 몇 번이나 나를 아프게 했는가'에 집중하며, 하나님께 받은 자비를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께 받은 용서가 너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한한 용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당시 사람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죄까지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 사랑은 계산이 없습니다. 셈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끝까지 품고 기다리며, 기꺼이 관계를 다시 여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용서는 우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우리를 통해 흘러가는 통로로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상대의 잘못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얼마나 용서 받았는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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